혈우병 환자들에게 녹십자를 묻는 다면, 단순히 “혈우병 치료제를 생산하고, 공급하는 회사”라고 답하는 환자들이 대다수 일 듯. 그러나 녹십자와 혈우병은 이런 간단한 관계가 아니다. 함께 태어나 함께 성장한 ‘혈연’관계라는 사실을 이해하고 있어야한다. 그리고 그 누구도 알려주지 않았던 숨은 사실이 있다. 이제 그 이야기를 하나씩 풀어가 본다.

혈우병과 녹십자의 관계를 ‘혈연’이라고 표현한 것에 혈우병 환자마다 호불호로 나뉠 수는 있다. 그러나 녹십자의 탄생과 배경을 짚어보면 모든 것이 귀결될 수 있다. 이혼하면 남남이 되는 부부관계가 아니라, 한 뱃속에서 태어난 ‘형제’같은 혈연관계라는 사실을 짚어보자.

◇ 녹십자의 탄생.

▲ 故 허영섭 회장

녹십자는 한일시멘트의 창업주 허채경 회장으로부터 시작됐다. 한일시멘트는 그의 장남인 허정섭 회장에게, 녹십자는 차남 허영섭 회장에게 운영권을 맡기게 된다.

녹십자는 1967년 10월경, 녹십자 전신 ‘수도미생물약품판매주식회사’를 설립했다. 창립자로는 허채경 회장을 비롯해서 허영섭 하일환 이병학 마웅호 김성근 박창운 김동순 하재원 등으로 구성됐다. 2년 뒤인 1969년 1월경, ‘극동제약(주)’로 상호가 변경한 뒤, 이어 1971년 10월 ㈜녹십자가 탄생됐다.

녹십자가 창립되었을 때, 사실 두드러지게 내세울만한 건 알부민이었다. 그러다가 녹십자가 혈액분획제제 등 특수의약품의 전문메이커로 발돋움 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혈우병’치료제였다.

1972년 세계보건기구에서 혈우병 치료제가 처음으로 알려지기 시작했고, 녹십자는 이듬해 1973년 8월경 보건사회부(당시 복지부 명칭)로부터 혈우병 치료제 생산 기자재를 받아 혈우병치료제를 생산하는 위탁사업을 시작했다.

녹십자는 1974년 1월부터 ‘항혈우병 그로브린인자’ 제조기로 혈우병치료제를 생산하면서 혈우병 환자들을 치료하기 시작했다. 이 치료제가 바로 ‘AHF(항혈우병인자(抗血友病因子) Anti Hemophilic Factor’이다. 녹십자는 복지부와 대한적십자사가 일본으로부터 공수해 온 제조기를 받아, 혈우병 치료제를 만들기 시작하면서 ‘혈우병 환자들에게 평생 무료로 공급하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 <혈우병치료제 국내생산>, <녹십자사 제조, 평생무료공급>, <한적(대한적십자), 일(일본)서 기재도입>라는 제하의 동아일보 1973년9월15일자 “혈우병 치료제인 항혈우병인자(AHF)가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로 생산돼 환자들에게 무료공급의 길이 트이게 됐다. 대한적십자사는 15일 치료약이 없었던 희귀병인 혈우병으로 목숨을 잃어가는 환자를 구제키 위해 보사부가 일본서 들여온 항형우병인자 제조기재(일천사백만원상당)를 한국녹십자사(경기도 용인군 대표 마웅호)에 전세주어 약품을 제조, 내년 1월부터 납품토록했다. 대한적십자사는 이에 따라 혈우병환자들에 대한 일제 등록을 실시, 녹십자사를 통해 생산하는 이 치료제를 환자들에게 평생 동안 무료로 공급키로 했다”고 보도했다.

이같은 역사적 사건은 녹십자 창립 이래 가장 큰 빅 이벤트였고, 국내 혈우병 환자들이 자국 생산 치료제로 평생토록 무상공급 받게 되는 계기가 마련된 것이다. 물론 녹십자는 알부민 개발 사업, 그리고 수출에 기여가 컸던 ‘유로키나제’가 있고, B형 간염백신 등 전국민을 대상으로 높은 성과를 거둔 치료제 개발이 뒤를 따랐다.

특히, 독감백신과 신종플루백신은 WHO(세계보건기구)로부터 품질인증인 PQ(Pre - Qualification)를 승인받았고 헌터증후군 치료제인 ‘헌터라제’는 큰 획을 긋는 치료제로 꼽힌다.

이같은 배경을 면밀히 살펴보면, 혈우병 치료에 대한 고 허영섭 회장의 역할이 매우 컸다. 그는 지난 2009년 뇌종양으로 세상을 떠났지만, 고인은 1990년 혈우재단을 설립하면서 91년부터 초대이사장을 맡아 3대 이사장까지 연임했고, 약속했던 것처럼 혈우병 환자 등록사업을 진행하면서 혈우병 환자들에게 치료제를 무상공급 했다. 또한 작고한 뒤, 그의 유언대로 그의 재산 670억이 사회에 환원됐다.

고인은 혈우병을 위해 한국혈우재단의 설립뿐만 아니라, 고리회(혈우병 단체 ‘한국코헴회’의 전신)와 ‘코헴의 집(수술한 혈우병 환자들의 쉼터)’을 수시로 방문해 혈우병 환자들과 직접적인 소통을 가져왔다.

◇ 누가. 허 회장의 뒤를 잇는 가?

허 회장이 작고한 뒤, 경영권 승계는 자동으로 부회장이었던 동생 허일섭 회장에게로 이어졌다. 이 과정 속에서도 매우 이례적인 모습이 나타났다. 대기업家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이전투구식 승계문제가 녹십자에서는 찾아볼 수 없이 간결하게 정리되었다. 허영섭 회장의 동생인 허일섭 회장은 자신의 아들 허진성 부장을 아직까지도 임원으로 발탁하지 않고 있다. 대신 형(허영섭 회장)의 아들들을 경영일선에 앞세워 선대회장의 승계를 도왔다. 이에 따라 현재 녹십자는, 허은철 녹십자 대표이사 사장(2015년)과 허용준 녹십자홀딩스 대표이사 부사장(2017년)을 맡고 있다.

故 허영섭 회장의 차남인 허은철 대표는 서울대를 졸업하고 미국 코넬대 식품공학 박사 과정을 마쳤다. 1998년 녹십자 경영기획실에 입사해 녹십자 R&D기획실 전무, 녹십자 기획조정실 실장을 거쳐 2015년부터 녹십자 대표이사 사장을 맡고 있으며, 허 대표의 동생 허용준 대표는 연세대를 졸업하고 미국 위스콘신 경영대 경영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2003년 녹십자 홀딩스에 입사해 경영기획실, 영업기획실을 거쳐 경영관리실장(부사장)을 맡았다.

故 허영섭 회장의 뒤를 잇게 될, 은철 용준 형제는 아버지의 생전 모습 속에서 혈우병과의 직간접적인 소통관계를 지켜보아왔을 것이다. 따라서 혈우사회는 녹십자에게 ‘비지니스’시각이 아닌 ‘혈연’관계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것이다.

▲ 녹십자 허은철 대표이사 사장(좌)/ 녹십자 홀딩스 허용준 부사장

◇ 녹십자,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 가?

녹십자가 혈우사회에서 해야 할 분명한 지표가 있다. 선대회장이 혈우병 환자들과 약속했던 ‘치료제의 평생무료 공급’을 유훈으로 잘 지켜야 할 것은 물론이거니와, 혈우병 환자들의 목소리에도 귀를 기울여야 한다. 아울러 혈우병 치료에 대한 적극적인 R&D투자와 국내뿐 아니라 국제혈우사회에서도 큰 역할을 해야 한다.

수차례 반복해 왔듯, ‘녹십자가 자국기업이기에 환자들이 선택하는 치료제’가 아니라 ‘효과 효능 면에서 다국적 기업보다 우월하기에 환자들이 선택하는 치료제’를 만들어야 한다. 지금까지 녹십자의 혈우병 부문 행보를 살펴보면 ‘한발 늦다’라는 아쉬움을 떨쳐버릴 수 없다. 환자들이 녹십자에 대해 날선 비판을 하는 이유는, ‘혈우병치료제 유통업체’라는 낙인으로 남지 말라는 것이며 환자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진정성 있는 모습으로 더욱 가깝게 다가서길 기대한다는 것.

주지하다시피 녹십자는 국내 혈우병환자들과 골이 깊은 고민이 한 가지 남아있다. 환자들은 생사를 걸고, 회사는 존폐를 걸어야 할지도 모른다. 즉 혈연관계는 절체절명의 기로에 섰다. 시작을 같이 했던 것처럼 매듭을 지혜롭게 풀어가 보자.

[헤모라이프 김승근 주필]

▲ 경기도 용인 녹십자 목암 타운에 위치한 녹십자 고 허영섭 회장 추모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