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회 한국코헴회장배 전국 당구대회 상급부 우승을 차지한 경북지회 김재일 회원

지난 주말, 전국 각지의 청장년층 혈우환우들이 서울의 한 당구장에 모였다. ‘당구’라는 하나의 매개체가 혈우사회에서 이처럼 큰 관심을 끌 수 있었다는 게 그저 신기할 노릇이다. 행사장으로 속속 모여 든 이들은 한결같이 환한 웃음을 띠고 있었다. 이 자리엔 처음 만난 이들도 있고 무척 오래간만에 만난 이들도 있다. 처음 만난 이들은 쓱~ 서로 눈치를 한번 살펴본 이후엔 금방 손 위와 손아래로 결정되면서 형 동생이 된다. 혈우사회에서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블러드 브라더스(Blood Brothers)’의 개념 때문이다.

이날 모인 이들은 그저 좋기만 했다. 오후 1시부터 8시 무렵까지 거의 7시간이나 경기가 치뤄지는 동안, 한 공간에서 같은 주제를 놓고 같은 곳을 바라봤던 이들. 저 멀리 강원, 광주, 전주, 부산, 대구를 비롯해서 충남, 충북 등 전국에서 모인 ‘블러드 브라더스’들은 손인사 눈인사뿐 아니라 서로 한쪽 가슴을 맞대고 등을 두드리기도 했다. 반갑다는 거다. 그리고 좋다는 거다.

▲ 전남지회(지회장 장영진) 지역대표로 대회에 출전한 박헌 회원

단지, 몇 개의 작은 공 따위가 혈우사회에서 이처럼 큰 힘을 발휘할지 누가 알았을까?

한국코헴회 박정서 코헴회장의 인사말을 시작으로, ‘한국코헴회장배’ 타이틀 쟁탈전이 8개의 당구대에서 동시에 진행됐다. 시너지를 발휘한 건 한국혈우재단(이사장 황태주)의 김진국 선생 구태형 차장 우종완 대리의 출전과, 제약사 녹십자 샤이어 화이자 한독 이수앱지스의 출전·참여였다. 이날은 재단도 제약사도 후원 입장이 아닌, 환우들과 땀을 나눠 흘리는 ‘출전선수’로써 당당히 참여한 것이다.

“와~ 환우들이 되게 많이 왔네요? 이런 게 얼마 만이에요?”

한 환우가 조용히 다가오더니, 내게 한마디 건냈다. 단일 행사로 청장년들만 이렇게 모인다는 건 쉽지 않다. 물론 청장년캠프도 있었고, 이벤트도 있었지만 한 가지로 특화된 단일 행사에 청장년 환우들이 모이는 건 정말 오래간만에 이뤄진 것 같다. 다양한 프로그램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머리를 쥐어짜며 불편한 시간을 보내야 하는 일도 없었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웃음과 대화와 즐거움이라는 단어들만 떠오르는 행사였다.

“오락기 당구로 연습하고 왔다”며 광주에서 올라온 한 환우는 대회시작부터 끝날 때까지 미소를 잃지 않고 경기에 몰두했다. 아울러 쉬는 시간이 주어지면 핸드폰을 꺼내들고 사진을 찍고 찍히며 참가자들과 담소를 나눴다. “대회에서 우승하려고 일주일 전부터 매일 당구장엘 다녔어” 부산에서 올라온 환우의 말이다. 대회를 위해서 며칠 동안 연습했다는 그는 보람있게도 대회에서 입상을 했다.

▲끝까지 최선을 다해 환우들과 경기을 펼친 회사 직원들은 ‘레드타이챌린지’ 캠페인까지 동참하면서 환우들에게 힘을 실어줬다.

환우들과 형 동생처럼 어울리면서 최선을 다했던 제약사 직원들도 보기에 좋았다. 여느 행사에서 그들은 후원자로만 나설 뿐 정작 물건너 불구경 하듯 먼발치에서 서성이던 것과는 달리 “그래 까짓거 한판 붙어보자”는 마음으로 누가 환우고 누가 보호자이고 누가 회사직원인지 모를 정도로 혈우사회인으로써 흠뻑 녹아들었다. 특히 녹십자 조인준 과장은 큐 브릿지를 보아 초보자인 게 확연했지만 당구공이 부수어지도록 온 힘을 다해 게임에 참여했다. 또한 한독에서는 여러 종목에 선수(?)를 출전시켰고 마침내 홍태웅 차장의 선전으로 초급부 3위로 입상까지 해냈다. 대회에 참여한 한 환우는 “경증 환우이거나 환우 아버지 인줄 알았다”며 “회사분이라면 시늉만 해주는 줄 알았는데 우리하고 같이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경기해 줄지는 몰랐다. 마음이 짠~하더라(너무 고맙다)”고 했다.

내심, 입상 기대를 가져 본 건 구력 200을 자랑하는 한독의 허비호 팀장과 화이자의 김군중 차장이었다. 높은 당구수로 화려한 개인기를 기대했지만 아쉽게도 샤이어의 진정훈 부장과 함께 모두 1회전에서 탈락하고 말았다. 이날 이수앱지스 임민호 과장 등 사원들도 참석해 논란 없는 ‘깔끔한 심판’을 보기도 했다. 환우들과의 자리가 어색한지 다소 긴장된 모습이었다. 그러나 이제 혈우사회 구성원으로 내딛고 있기에, 마치 군대에서 자대배치를 받아 내무반으로 막 들어온 초병처럼 긴장될 수밖에 없다. 시간이 흐르면 이들도 누가 환자인지 누가 보호자인지 구분이 안 갈 정도로 녹아들게 될 듯.

경기는 저녁 8시 무렵 마무리가 됐다. 건장하게 보이는 경북지회 청년이 상급부 우승배를 거머줬다. 누가 보더라도 인정할만한 당구 실력자였고 매 게임 회선을 다하는 매너 있는 플레이어였다.

“내년에도 또 할꺼죠?”

게임 초반전에 탈락하고만 한 청년이 박정서 회장에게 다가가 묻는다. 질문을 던진 그는 마치 ‘두 번 다시는 대회가 없다’라고 하면 탄핵이라도 할 기세였다. 그가 말하자 박 회장은 웃으며 “당연히 있습니다. 해야죠.”라며 아쉬운 눈망울로 바라보는 청년에게 ‘다음’이라는 기회의 선물을 줬다.

▲ 한국코헴회 박정서 회장이 <한국코헴회장배 전국 당구대회>개회사와 함께 개회선언을 하고있는 모습.

▲ 한국코헴회 남용우 사무국장이 경기방식과 주의사항 등을 전달하고 있는 모습

◇ 국제 혈우사회의 스포츠

140여 국가로 연결된 WFH(세계혈우연맹)는 그 이름이 국내 혈우사회에서도 익숙하다. 이곳에 소속된 국가는 나라별 특성에 맞게 다양한 행사가 진행된다. 성과 있는 프로그램이 개발되면 전세계 혈우사회는 그 연결망을 통해 급히 타전되고 이내 해당 국가와 지역 특성에 맞춰 다듬어지고 행사가 치러진다.

국제혈우사회의 스포츠 행사 중에 많은 국가에서 시행되고 있는 골프가 있다. ‘골프’는 걷기운동을 비롯해서 집중력을 향상시키는 스포츠로 인기 있는 스포츠이다. 수영, 자전거 등과 같이 혈우병 환우들에게 권장되는 운동 중에 하나이다. 그러나 국내에서 골프는 대중적 스포츠가 아닌 다소 ‘사치’라는 비판적 시각이 있다.

이런 가운데, 적당한 걷기운동의 효과를 기대할 수 있는 ‘당구’는 환우들의 스포츠로써 아이템이 적절했다. 국내 시각도 ‘오락’이라는 시각에서 ‘스포츠’라는 시각으로 개선됐고 초보자들도 쉽게 시작할 수 있는 운동이기 때문이다. 국내 혈우사회에서 ‘당구’가 자리 잡기 위해서는 대회를 거듭하면서 혈우사회 구성원들의 참여가 꾸준해야 한다는 과제가 남아 있다.

▲ 국제혈우사회는 환우들과 함께하는 골프 프로그램이 진행되고 있다.

▲ 지난해 한 혈우사회 공동체에서는 골프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참여 제약사들의 레드타이캠패인도 펼쳐졌다.

◇ 국내 혈우사회의 당구대회

지난 3월경, 한국코헴회 서울경기(지회장 김영기)는 지회 행사로 '모꼬지 당구경기'를 진행했다. 지회 행사가 큰 호응을 얻자, 전국 당구대회로 급부상되면서 <한국코헴회장배 전국 당구대회>로까지 이어지게 된 것이다.

앞서, 서울경기 지회는 ‘모꼬지(총무 박유성)’ 소모임이 있는데, 김은기 전 비대위원장 시절 회원들 간 친목을 도모하기 위해 조성됐다. 이 모임은 오목대회, 바둑대회 등 친목과 함께 경합을 겨루는 다양한 행사를 진행해 왔다. 이 모임에서 ‘당구대회를 열어보면 좋겠다’는 목소리가 나왔고, 지회행사에 이어 전국대회로까지 확대된 것이다.

[헤모라이프 김승근 주필]

▲ 지난 2015년 당시 김은기 비대위원장(현 코헴회 부회장)과 박유성 모꼬지 총무(우측)가 오목대회 조별 추첨을 진행하고 있는 모습 ⓒ헤모라이프 자료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