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재판소는 지난 2012년 6월 27일, 혈우병 치료제의 건강보험 적용에 나이 제한을 두는 것은 불합리한 차별로, 헌법에 어긋난다는 결정을 내린 바 있다.

앞서 보건복지부는 "83년 이후 출생자“라는 ‘한정고시’로 혈우병 치료제의 보험급여 적용 여부를 나눴다가, 혈우병환자들이 소원을 제기하자, 헌재는 ”평등권 침해"라는 결정을 내렸다. 그러면서 헌재는 "보험재정의 악화를 방지하기 위해 요양급여의 대상을 한정할 필요가 있다 하더라도 출생의 시기라는 우연한 사정을 가지고 동일한 환자를 차별하는 것은 평등권을 침해한다“고 했다.

나아가 헌재는 "연령에 따른 제한을 폐지하더라도 보험재정이 악화될 우려가 있다고 보기도 어렵다"고 지적했다.

이같은 헌재 결정이 있자, 연령제한이라는 복지부의 ‘한정고시’는 사라졌다. 그러나 몇 해 지나지 않은 상황에서 다시 슬그머니 ‘연령제한’이라는 한정고시가 또 등장했다. 복지부가 혈우병 환자를 대상으로 한 연령제한에 집착하는 이유가 과연 무엇일까?

◇ 만18세를 기준으로 한 월 처방횟수 제한

혈우병 A환자들이 사용하고 있는 치료제 그린진에프 진타 솔로퓨즈 등등의 현행 보험급여 세부기준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보험급여 세부 인정기준

처방횟수를 놓고 연령제한 기준이 또 등장한다. 환자의 나이가 18세미만일 경우 최대 1회 처방시 최대 6회분, 월 총 12회분이 처방된다.

그리고 이후 출혈발생시 마다 2회분씩 의사소견서를 첨부하고 정밀 심사를 하는 조건을 붙여 추가처방이 가능하다는 급여기준을 적용하고 있다. 아울러 만 18세이상은 5회씩 두 번 총 10회분과 추가처방이라는 조건이 붙여 있다.

이렇게 연령제한으로 보험급여적용을 해 두면, ‘불필요한 과잉처방을 막을 수 있다’는 꼼수가 숨어있는 듯해 보인다. 그러나 이런 기준은 두 가지 모순점이 있는데, 첫 번째는 횟수제한을 하면 과잉처방을 오히려 조장하게 된다.

“안내 말씀드립니다. 금일 물탱크 청소관계로
단수가 예정되어 있사오니 양해바랍니다”

다세대주택 관리소에서 간혹 스피커를 통해 안내되는 방송이다. 이런 경우 각 가정에서는 욕조를 비롯해서 이곳저곳 저장할 수 있는 만큼 그릇과 찜통이 등장한다. 물탱크 청소가 완료되면서 다시 수돗물은 정상 공급 된다. 결국 각 가정에 받아놨던 저장물은 필요치 않은 화장실 청소용으로 사용되곤 한다.

따라서, 횟수를 제한하면 환자들의 심리적 압박 때문에 불필요하더라도 일단 약품을 타 놔야겠다는 심리가 발생된다. 매달 이렇게 모아 놓은 치료제 중에 자칫 유효기간을 넘기게 되면 남은 수돗물처럼 화장실 청소용으로도 사용하지 못하고 쓰레기 봉투 속에 처박히게 된다.

제한이라는 것은 오남용을 막고 불필요한 것을 막는데 필요한 조치이다. 그러나 혈우병 환자들은 만성질환으로 혈우병 전문의를 통해 치료를 받고 있다. 따라서 축척된 치료 히스토리가 환자마다 존재한다. 그러므로 약품처방은 전문의사의 고유권한으로 맡겨두면 된다. 복지부나 심평원에서 ‘혈우병 전문의사의 판단을 믿지 못한다’는 취지의 보험급여기준은 모순이다.

두 번째, 현행처방 기준은 혈우병 치료의 특성상, 매우 치명적인 오류를 갖고 있다. 혈우병 치료의 기본은 ‘예방요법’이 가장 효과적인 치료법이다. 애초 혈우병 환자들은 응고인자가 생성되지 않기 때문에 몇 일 간격으로 응고인자를 체 내에 주입하여 응고인자의 수치를 활성화 시켜주는 방법이다. 이렇게 되면 중증환자들은 자연출혈이 없어지고 환자들에게 관절장애가 현저하게 감소된다.

이같은 발표는 WFH(세계혈우연맹)를 비롯해 국내외 혈우병 전문의들의 한결같은 목소리이다. 이같은 치료법을 예방요법(프로플락시스, prophylaxis)이라고 말한다.

◇ 처방량을 늘리라는 것이 아니다. “사후치료법에 앞서 사전치료법이 효과적이라는 것”

그러나 현행 보험기준은 프로플락시스 치료법이 아닌 온-디멘드(출혈시 사후조치) 치료법에 근거를 두고 있다. 프로플락시스의 기준을 어떻게 산출하느냐에 따라 프로플락시스와 온-디멘드의 치료방법의 1인당 환자 치료비용을 살펴보면 큰 폭의 차이가 발생되지 않는다. 따라서 비용문제도 아니다. 사후조치와 사전조치는 혈우병 환자에게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특히 현행 사후조치 치료법은 제 2차 3차 재투여가 필요한 경우가 발생되기도 하기 때문에 오히려 비용적인 문제도 현행 기준에서의 비효율성이 높다.

더욱이 혈우병 환자의 1회 내원시 처방량을 제한하고 있는데, 이에 따라 환자들은 월 2-3회씩 요양기관을 방문해야 한다. 전문의사의 판단에 의해 1회 방문으로 환자의 월 사용량을 처방하면 될 것을, 불필요하게도 현행 보험급여 기준은 수회씩 병원을 재방문하게 만들어 재진료만 발생할 뿐이다. 즉 현행 보험급여 기준은 보험재정이나 환자에게 도움이 전혀 되지 않는다.

최근 건강보험심사평가원 등 유관기관을 통해 알려진 혈우병환자들의 치료비는 그 규모가 적지 않다. 이런 비용은 매년 늘어나고 있는 추세이다. 그러나 혈우병 환자들은 여러 제한조치로 효과적인 처치를 받기 어렵다. 여기에서의 문제는 치료비용을 절감하기 위한 방편으로 단순히 처방량을 제한하는 것은 무의미 하다는 것이다. 원내 처방량을 제한하면, 제한이 없는 입원치료를 조장하게 된다. 악순환이 반복되기 때문이다.

혈우병 의료 선진국에서는 혈우병 전문의에게 온전히 판단을 맡겨두고 있다. 따라서 환자의 출혈시 충분한 조치가 이뤄지고 있고, 반면에 불필요한 처방은 의사판단에 의해 엄격히 관리되고 있다. 시장 경제도 마찬가지이다. 시장에 자율성을 보장하면 스스로 발전과 정화작용이 이뤄진다. 그러나 정부의 개입 등 규제를 두게 되면 기형적인 편법이 발생하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이다. 혈우병 치료제는 비타민이나 진통제 같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오남용이라는 것은 애초 있을 수 없다. 사용되지 않고 폐기되는 것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시대에 뒤떨어진 처방제한과 같은 모순덩어리의 의료규제는 조속히 폐지되어야 할 것이다.

혈우병 환자들은 ‘더 많은 치료제의 처방’을 원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효과적인 처방을 위해 호소하는 것이다. 월 10회 처방을 월 100회 처방으로 늘린다고 해서 반길 환자들은 없을 것이다. 처방량을 늘려야 하는 것이 아니라 비효울적인 제도를 효과적인 제도로 바꾸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과 같은 ‘사후치료’ 처방기준은 약품을 단순히 치료소비 비용으로만 지출되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사전치료’에 대한 처방기준이 보험급여로 적용되면 환자들의 삶이 개선될 뿐 아니라, 효과적인 치료로 정기적 보험재정 지출도 개선시킬수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헤모라이프 김승근 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