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경하는 시인 한 명쯤은 가슴에 품고 살던 시절이 있었다. 권력에 투쟁했던 저항시인이나 투명한 영혼을 노래했던 서정시인들은 어느덧 세상을 한둘씩 떠났다. 사람들의 가슴속 시는 오래된 클리셰로 동경의 대상이지만, 현대시를 떠올릴 땐 누구의 이름을 먼저 떠올릴까.

모니터 위의 폰트에 비해 아직도 책이라는 소재는 아날로그 감성에서 유효하다. 그 아날로그 감성으로 억압받은 여성이 써 내려간 한 권의 시집에서 성 해방을 갈망하는 도발의 한 수를 읽을 수 있다. 해방되고자 하는 몸부림은 기존 여성들의 분노와는 사뭇 다르다. 분노에 피로감이 밀려오기보다 응원해주고 싶은 마음이 샘솟는다.

시랑의 경우, 폐쇄적인 문단 구조에서 공모전을 통해 입상한 시인은 아니지만, 시적 완성도는 찬사를 아낄 필요 없을 만큼 뛰어나다. 이외수 작가가 머무는 화천의 감성마을에서 4년간 갈고닦은 실력으로 시집을 발간했고 이미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최근 발표된 소설 회색인간 또한 등단하지 않은 작가가 출간했지만 역시 호평을 받고 있다. 최근 붉어진 문단 내 성폭력이나 김지현 배우와 이윤택 연출가의 사건은 바로 집단의 폐쇄성에서 찾아볼 수 있다. 문학도 등단이라는 권력 구도가 어쩌면 문단 내 성폭력이라는 사태를 키운 것은 아닐까 조심스럽게 내다본다.

시랑 시인은 페이스북 독자에게 소개했던 시를 모아 팬들이 펀딩 해준 금액으로 책을 제작했다. 출판사에서 제법 러브콜도 받았다고 알고 있지만, 특유의 반골 기질 덕분인지 독립출판 출간을 선택했다.

드라마적인 표현기법과 각각의 소재를 다룬 메타포는 철학적인 메시지가 가볍지만은 않지만, 그렇다고 고리타분하지 않다. 성인용품으로만 우리가 성의 은밀함을 엿보았다면, <발칙한 섹스>에서는 세탁기나 코카콜라, 손톱깎이, 수족관, 나비 같은 일상의 소재가 에로티시즘의 소재로 활용되는 것에 감탄하게 된다.

시집은 볕이 잘 드는 카페에 앉아 한 장씩 넘기다 보면 어느새 얼굴이 붉어져 다른 이의 시선에 신경 쓰게 될지 모르지만, 친밀한 소재로 성애의 아름다움을 가감 없이 표현했다. 소문이 무성했던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가 좀 싱겁다는 분들은 기대하고 보셔도 될 법하다. 저돌적이고 솔직한 표현에 손뼉이라도 치고 싶은 심정이다.

‘어제의 사랑은 어디까지가 표절인가요? 체위가 같나요? ctrl+c, ctrl_v 창의적으로 디자인해봐요’ 발칙한 섹스-카피카피 본문

현재 한국은 검열제도에 따라 포르노를 비롯한 성인의 유희에 대해 19금 표시로 모든 것을 금지하고 있다. 하지만 19세 이전에 포르노를 접하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다. 성을 검열 하에 두면 수면 아래서 기생하는 구조로 많은 문제를 야기한다. 최근에 출간된 시랑 시인의 <발칙한 섹스_슬픈 쾌락주의자의 정직한 엉덩이>는 시의 장점을 잘 살려 단순하고도 명쾌하게 남녀의 구조와 여성이 원하는 섹스에 관해 적나라하고 솔직하게 대담함을 살려냈다.

82년생 김지영이 여성의 고충에 대한 사회상을 표현했다면, 이제는 도발적이고 선정적인 표현으로 남자들이 마초적으로 묘사했던 성애에 대하여 도전장을 내민다. 하지만 남성의 시선에 그치지 않고 섬세하고 감성적인 표현이 깊고 발칙하게 다가온다. 벨훅스가 말하고자 했던 여성으로서의 성의 고단함을, 남성의 불쾌한 요구에 대해 한 발짝 더 앞서 나아가 내 멋대로 성을 즐기겠다고 알몸으로 선언하며 쾌활하게 떠드는 여인의 모습이 그려진다. 오르가즘의 묘사 또한 경쾌하고 솔직하다. 그간 시가 시인의 삶을 주제로 독자들에게 다가갔다면, <발칙한 섹스>는 세계 최초 성애 시집으로 기록되지 않을까. 채털리 부인의 사랑이 지금껏 기성 시대 남성이 추억하는 최고의 에로스라면, 시랑의 시집은 역사를 새로 쓰고 있는지도 모른다. 마치 넷플릭스나 왓챠플레이에서 상영되는 무한 영화 콘텐츠처럼.

재갈이나 수갑, 코스프레, 메이드복, 마조히스트, 새디스트로만 성적인 판타지를 꿈꿨던 사람들이라면 일상의 소재가 이토록 섹시한 모습으로 돌변할 수 있다는 것에 해방감을 느낄 수 있다. 시의 장소는 시베리아나 베이커리, 카페, 커피숍 등 일상적인 장소들이다.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가 재벌 남성의 선택받은 신데렐라였다면, 시랑의 시에 등장하는 여성은 잔다르크 같은 여전사의 모습으로 스스로 여성의 성 개념을 깨트린다.

시집이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다음 시랑의 시집에서는 노트북이나 츄파춥스, 속옷, 란제리의 미학을 대담하게 표현하거나 아이폰, 던킨도너츠나 딸기, 또는 시큼 거리는 석류도 좋은 에로티시즘의 소재로 변신할 수 있지 않을까.

체온을 그리워하며 포르노를 즐기는 고독한 도시인의 몸짓에 언어의 환희를 선보이며 문학의 향기를 선사할 것으로 본다. 시각적 피로감에 상상하는 것을 점차 잊어가지만, 구체적인 묘사와 레토릭은 에로티시즘과 포르노를 굳이 말하지 않아도 다른 깊이를 절감할 수 있다.

로리타가 예술로써 인정받기까지도 찬반 논란이 많았다. 실제 판매금지가 되었지만, 예술은 금기의 영역에서 사회와 씨름하는 존재여야 한다. 계도적인 사회를 부수고 자유를 외치는 것이야말로 예술의 본 기능이 아닐까. 결국, 사람들은 금지하지 않아도 스스로 질서를 찾기 마련이다. 오히려 지금의 문단 사태나 연극계에서 목격했듯 막고 가리면 더러운 냄새를 풍기며 썩어버린다.

시랑 시인의 시집은 반골의 피를 수혈이라도 받은 듯 19금 없이 세상에 나왔지만, 간행물 윤리 규정위원회에서 어떤 판단을 내릴지 모르겠다. 지금껏 보았던 19금 어떤 책보다도 은밀하고 음탕하며 대담한 표현을, 작금의 시대가 어디까지 허용할지는 모를 일이다.

시랑의 행보에 발칙한 기대가 된다.< 저작권자 © 헤모필리아 라이프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