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정일 뉴스파인더 논설위원 / 전 서울시사회서비스원 대표

공기업 대표를 하던 2년 전쯤 일이다. 결재를 받기 위해 담당자가 대표실에 들어왔다. 어, 뭐지? 슬리퍼를 신고 들어온 거다. 10명 중 6-7명이 그랬다.

당황스러웠다. 나 때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3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의 그들이다. 어린 친구들이 싸가지가 없네. 그 자리에서 한소리를 하지는 않았다. 아니 못 했다.

밖에 나가 고자질하듯 지인(知人)들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행동 지침을 구했다.

따끔하게 공자왈맹자왈 가르쳐야죠. 그렇지!
자유로운 복장의 하나인데 무슨 문제죠? 그런가?

약 7대3 정도로 가르침을 권하는 지인이 많았다. 꼰대 주위에 꼰대가 많은 건가? 그냥 넘어가야 하나? 내가 받은 교육과 겪은 경험, 문화도 소중한데....

한 달 정도 더 고민 끝에 A4 용지를 대표실 출입문에 붙여 놨다.

NO. Slipper !!!
슬리퍼는 자기 자리에서만 신는 걸로...

한바탕 난리가 났다고 한다. 대표실에서 그들의 슬리퍼를 더 이상 볼 수 없었다.

한참 후에 식사 자리에서 직원이 물었다. 대표님, 청바지는 괜찮은가요? 반바지는요? 치마는 얼마나 길어야 하나요? 민소매도 안 되죠?

쩝, 할 말이 궁색하네. 합리적인 기준을 제시할 수 없었다.

또 한참 후에, 길거리에서 삼삼오오(三三五五) 다니는 중고생(中高生)들을 보고 깨달았다. 싸가지가 없는 게 아니고 문화(文化)의 차이였다는 걸.

그들 열 명 중 여덟의 발에 슬리퍼가 자리하고 있지 않은가. 어릴 적부터 어디서건 신고 생활한 슬리퍼는 그들의 편한, 문화 한 가지였다.

특정 장소에서는 슬리퍼를 신지 말아야 한다는 게 60대에게는 예의(禮儀)였지만 3-40대에게는 그렇지 않은 거다. 그 차이를 이해하지 못해 난 언짢았던 거였고.

인식의 다름으로 인한 행위와 싸가지 없음의 경계선은 애매모호하다. 나의 생각과 다른 행위가 곧 싸가지 없음은 아닐진대 소위 어른(?)들은 왕왕 싸가지 없음으로 쉽게 규정한다.

그로 인해 생기는 갈등과 충돌은 적지 않다. 지하철에서 식당에서 축구장에서 정치권에서... 도처에서 신구(新舊) 간의 다툼이 일어나는데 이거다 하는, 속 시원한 해결책은 아직 없다. 그냥 서로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하나 마나 한 소리 말고는.

기둘려 봐아. 시간이 해결해 줄 겨. 걍 이렇게 지지고 볶다 보면 자연빵으로다가 기준이 안 생기것냐. 인생을 아주 천천히 살아가는 친구의 말이다.

슬리퍼가 대표실을 자유롭게 수놓을 날도 멀지 않았다. 그때까지 크고 작은 갈등과 충돌이 있겠지. 과정에서 어른들이 이것만은 지켜줬으면 하는 마음이 있다.

자리나 위치, 나이가 옳고 그름의 기준이 되지 않았으면
물리력으로 행위의 다름을 제재(制裁)하지 않았으면 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