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스코틀랜드의 어느 공원

글래스고 WFH총회 참석차 묵은 숙소 옆에는 숲길과 잔디로 조성된 공원이 있다. 아침 7시 조금 넘은 시간에 인근 주민들로 보이는 중년의 사람들이 여러 종류(그야말로 종이 다양했고 대형견이 주를 이루었다)의 개들을 산책도 시키고 목줄을 풀어 뛰어 놀게 하는 광경을 3일정도 지켜보는 기회를 가졌다. 드는 생각은 ‘이 나라는 반려견에게 일정 시간 자유를 주지 않으면 법적 제재가 있는 것이 아닐까’였다. 그러기에는 지극히 평온하고 자연스럽게 보였다. 동물학자 제인 구달의 말이 스치는 순간이기도 하다. ‘인간이 개성과 마음, 감정을 지닌 유일한 동물이 아니라는 것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덜 오만해질 수 있다’고. 이 말은 동물에 대한 이해를 말하는 것인데 나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타자에 대한 이해로 받아 들여졌다. 하지만 이해의 범위에서 다른 것을 틀리다고 우길 것도 아니지만 틀린 것을 다른 것이라고 양해할 일도 아니다. 명확하지만 표현은 완곡해야 한다는 생각은 늘 가지고 있지만 이번에도 실패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우아한 헛걸음(산책)’의 아침 시간 내내 햇빛은 찬연하지 않았고, 대기는 불투명하였지만 초록이 무르익어 가는 나뭇잎들은 청결하고, 장난처럼 몸을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은 차가왔지만 가볍고 부드러웠다. 어제까지 무거웠던 마음도 어느덧 무게를 잃고 가벼워졌다. 삼일동안 왜 무거웠나는 기대치와 비례했을 것이고 접으니 가벼워졌다가 옳을 것이다. 이후 산책은 조식시간을 늘리는 것으로 대체했다.

그때 하늘 저편에서 한 떼의 새들이 나타났다. 새들은 하늘을 가로지르며 몇 번 맴돌더니 일제히 나무 그늘 속으로 날아 들어가 몸을 숨긴다. 문득 궁금해진다. 왜 새들은 창공을 마음껏 유영하고 누리는 대신 나뭇잎들 사이로 성급히 숨어드는 걸까. 먼 곳으로부터 날아온 오랜 비행에 지친 탓일까. 하루시작을 재정비함 일까. 아니면 모여서 주고받을 급한 소식들이 있는 걸까. 네 번째 들려드릴 이야기는 숨어들기에 좋은 곳이기도 하고, 지친 육신을 잠시 쉬어가기도 하면서 재정비 시간을 갖기도 하며, 무엇보다 서로의 안부를 묻고 소식을 접하는 가교 역할을 하는 곳, 우리들의 ‘둥지’ 한국코헴회 사무국이다.

세상의 모든 조직은 효율적인 집행을 위하여 실행 기구를 갖는 것이 일반적이다. 대한민국의 행정부는 국무조정실(옛 총무처)이 그 역할을 담당하고 입법부는 사무처, 사법부는 법원행정처가 대표적이다. 동의하지 않지만 대표기업이라고들 하는 삼성의 경우 회장비서실에서 출발해 구조조정본부, 전략기획실, 업무지원실 등 고비마다 이름만 바뀐 미래전략실을 들 수 있겠다. 모두 알다시피 지난해 이재용 삼성 부회장은 ‘박근혜 정부의 최순실 등 민간인에 의한 국정농단 의혹 사건 진상 규명을 위한 국정조사 특별위원회’ 청문회에 증인으로 참석 “미래전략실을 없애겠다”고 말했다. 두고 볼 일이다.

▲ 한국코헴회 조직도

피부로 느끼는 예로는 지금은 무엇이라 불리는지 모르겠지만 초중고 시절에는 서무실이라는 것이 존재했음을 기억한다. 대형 병원의 경우(신촌세브란스) 진료지원부서를 두고 병원행정의 모든 것을 뒷받침하는 시스템으로 운영된다. 혈우재단도 재단사무국을 두고 운영되고 있음을 안다. 두리뭉실 퉁치자면 한국코헴회 사무국(이하 사무국)은 위에 언급한 모든 일을 한다고 보면 된다. 한마디로 열일 한다. 더욱 좋은 점은 특수 목적기구이기 때문에 대형기관의 실무실행기구에는 없는 인간적 접근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세세히 풀어보고 환우들의 편의 증진과 정보 비대칭을 개선하기 위한 팁을 드리고 평(評)도 곁들인다.

사무국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한국코헴회 구성을 알아야 한다. 한국코헴회 홈페이지 → 코헴회 소개 → 코헴회 구성을 보면 사무국은 사무국장, 선임간사, 일반간사 등 전임자을 두고 있으며 현재는 국장을 포함한 4명의 국원과 별도로 코헴의 집 간사 한명, 비전임 한명을 두고 있다. 이에 대한 근거는 정관에 바탕을 두고 있음은 분명하다.

그럼 사무국은 무슨 일을 하는가. 따박따박 회비는 내고 있지만 모르다 보니 오해가 생기고 마냥 놀고 있을 것이라고 지레짐작으로 근거 없는 비난도 들려오는 것도 사실이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 이 문장은 유홍준교수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 서론 부분에 있는 글이다. 이와 같은 자세로 안내를 받다 한 분이라도 사무국을 대하는 자세가 달라진다면 수고로움이 덜어 지겠다.

열일 한다고 했지만 열일을 필자도 자세히 모른다. 그래서 집에는 <한국코헴회 사용설명서>라는 브로슈어가 비치되어 있다. 엿보기를 하면 책자형태의 첫 표지에는 ‘혈우가족들이 보다 알기 쉽게 한국코헴를 이용하실 수 있도록 제작하였습니다’는 구절로 구애의 표정을 짓는다. 간지나게 세 손가락을 세워 하트문양까지 보다 보면 유혹을 외면하기는 어렵다. ‘그래 네 맘대로 해봐라’라는 심정으로 책장을 넘긴다.

▲ 한국코헴회 이남일 간사(우) 손완호 간사

어라! 친절하게도 자신을 사용하기 전 이렇게 해 달라고 참고사항을 일러준다. 알고 괴롭히란 건데 그리 하겠노라 다짐한다. 다 읽고 부족하다고 느낀다면 페이스북(검색창 - 한국코헴회/Korea Hemophilia association)이나 한국코헴회 홈페이지(www.kohem.net)를 방문 하시면 더 많은 내용들이 있다고 온라인상의 만남도 제안한다. 급한 사람은 ☎ 02-584-9916의 유선으로 통화도 가능하다고 전화번호도 남발하니 보통내기는 아닌가 보다. 그러면서 자신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순서(목차)가 있단다. 열거하면 ● 팩터, ● 건강관리, ● 회원지원, ● 응급사항, ● 진료, ● 상담, ● 교육, ● 기타. ● 회원의 의무를 알려준다. ‘연애의 기술’을 아무 거리낌 없이 내놓은 거다. 알기 쉽게 열심히 따라가다 걸리는 게 있었다. 전화상담란(19금이 아니라 페이지다)에 곰 같은 사내가 왼손에는 전화기를 오른손에는 필기구를 들고 뭔가 하는 사진이 보인다. 혹시 이 곰과 나랑!!! 아~~놔. 건전한 생각으로 돌아오는 순간이다.

이처럼 사무국은 브로슈어에 소개한 일들뿐만 아니라 덩치 큰 코헴회 목적사업, 회장의 중점관심 사업, 대의원회의 의결사항 실천의 최전선에 있다. 때로는 능력이 부족해서, 몸이 따라 주지 않아서, 일의 경중의 오판에서 실수가 있었더라도 성실함과 공정함은 놓치지 않았다는 생각이다. 비평과 비난은 구분되어야 한다. 안타까운 현실이만 아직도 곳곳에서 반작용을 본다. “개들은 학교를 다니거여.? 한글도 몰라? 이러니 개.돼지 소릴 듣지”, “생계형 임원(국원은 임원이 아니다)들은 퇴출 시켜야 환우단체가 바로 설수 있다.”(맞춤법과 내용을 그대로 인용한다) 등 기본적인 사실관계도 틀린 언설의 무례함이 끼리끼리 형성된 SNS상에 난무한다. 정관의 유권해석을 바르게 내린 사무국을 향해 친구(이긴 할까)의 출마가 좌절됐다고 철지난 으리으리(?)에 기대어 ‘동물의 입안의 아래쪽에 붙어 맛을 구별하고 음식을 씹고 삼키는 구실을 하는 육질(肉質)의 기관(다음 사전)’이 다른 용도로 사용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지난 해 사무국을 향한 최악의 비난이다. 의리는 정의로운 곳에 쓰여지지 않으면 폭력이다.

어느 조직이나 우여곡절도 있고 부침도 있을 것이다. 그나마 30년 이라고 하는 코헴회 역사에서 최고의 결정은 환우단체라는 연대체를 구성하는 것이었고 내부에 사무국이라는 실행기구를 두었다는 점이다. 돌아보면 탁월한 혜안이었다. 둥지가 없는 단체는 이견은 조정되지 못하고 서로의 생각을 중재하지 못하며 좋은 생각은 촉진하지 못한다. 이 지점을 해소한 것은 전적으로 사무국의 존재 때문이다. 수도꼭지의 뜨거운 물, 차가운 물만 돌리다가 물만 낭비하는 ‘샤워실의 바보’가 아닌 것만도 커다란 축복이다.

역설적으로 사무국이 문제의 시절이 있었다. 사무국은 헤게모니 쟁탈의 축소판이었다. 일찍이 배운 민주주의를 떠받치는 커다란 원리 가운데 하나는 다수의 지배라는 알짬은 휴지조각에 불과했다. 그것은 허울 좋은 구호가 아니라 오늘날 대부분의 사회에서 관철되고 있는 원리는 안중에도 없었다. 한 공동체의 선택을 최종적으로 좌우하는 것이 소수의 사람처럼 보이는 경우에도, 그 선택의 배후에는 ‘회원’이라고 지칭되는 침묵하는 다수의 의사가 있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항상성 유지에는 털 끝 만큼 관심이 없는 행위의 내적 동기가 궁금했다.

사무국을 장악하면 자기사람 심기 바빴고 꽂아진(이런 것도 일자리 창출이라고 해야 하나) 사무국원의 근태는 엉망이고 사적이익의 복무에는 철저했다. 업무시간이 뒷전이니 야근이 필요했고 저녁까지 해결하면서 흥청망청 반주도 곁들인 나날들이 지속됐다. 외근을 핑계로 소재를 알리지 않고 잠행은 다반사고 보고체계가 만무하니 흐지부지 넘어가기는 불문가지였다. 어쩌다 잘못이 지적되면 흙 묻은 자신만 탓한다고 노발대발, 똥 묻은 남 탓하기는 신의 경지라 할 만하다. 이러니 사무국의 단합은 지혈용으로 쓸려고 해도 찾아 볼 수 없고 추종하는 윗선이 다르니 한 공간에서 반목은 점입가경이다. 그렇게 2년. 레짐 체인지가 있어도 반복되는 못된 관습은 여전했다. 누구는 바다에 나무를 심고자고 우기고, 누구는 산에 배를 띄우자고 우긴다. 웃기지 않는가. 둘 다 틀렸는데. 한 패는 나무를 심겠다고 바다로 향하고, 한 패는 배를 띄우겠다고 산으로 향하는 모습이.

일반 다수의 패배주의, 비관주의는 혈우병이라는 형질의 문제가 아니라 역학(力學)적 결과일 따름이다. 문어발같이 소리 없이 뼈도 없이 감겨드는 모멸감은 당연하다. 아우성은 비행기 폭음에 지워지는 참새 울음에 불과했다. 이정도면 누구라도 몰랐을리 없다. 외면했을 뿐이다. 그 후과를 아프게 치렀고 치르고 있는 중이다.

패배주의와 비관주의는 잘못된 곳에 쓰여진 ‘의리’와 함께 다음과 같은 수사를 동원하기도 한다. “좋은 것이 좋은 거”라는 식이나 “사무국에서 일하는 놈들은 거기서 거기이기 때문에 아무나 해도 된다”식으로 말이다. 이런 사고방식은 구습을 아무런 성찰도 반성도 없이 관성적으로 견인함으로써 구습의 지속에 가장 크게 기여한다. 이런 점에서 우리 모두는 공범자다. 누구도 부인 못할 것이다. 나 역시 잘 한 일이 없고 남한테 잘해본 일도 없고 일개 필부로서 명 보존한 것에 불과하지만 다행히 부끄러움은 안다.

박경리의 토지를 보면 길상이 한복에게 충고의 말을 건넨다. “너의 아버지는 너 한 사람을 가난하게, 핍박받게 했지만 세상에는 한 사람이, 혹은 몇 사람이 수천만의 사람들을 가난하게 하고 핍박받게 한다는 것을 왜 모르느냐 말이다! 지금 당장 목전의 원수는 일본이지만 따라서 너의 형도 목을 쳐야겠지만, 제발 일하라 않겠으니 숨지만 말아라. 너의 자손을 위해서도, 너의 아버지의 망령 평생 짊어지고 다니다가 너의 자손에게도 물려줄 작정이란 말이냐?”(3부 4권 P353~354). 한복은 자신의 잘못은 아니지만 아버지와 형의 수치를 떨치고 일어나 작은 독립운동에 나선다. 부끄러움을 알고 외면하지 않았던 것이다. 한복이도 그랬지만 단 한 번의 깨우침으로 당장에 ‘뽕나무 밭이 변하여 푸른 바다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다수의 의견이 모이면 모일수록 의미 있는 균열을 낼 가능성 또한 커진다. 생각을 풀어 나갈 수 있는 계기는 이 지점부터이다.

▲ 주희 간사

다행히 3년 전을 기점으로 사무국도 정상화의 길로 접어든 것으로 보인다. 채용공고를 내고 면접을 거쳐 3개월의 수습이 만료되면 국원들의 다면평가 자료를 코헴회 최고의사결정 기구인 대의원회의에 제출한다. 이를 바탕으로 대의원들의 질문과 당사자의 발언을 듣고 추인을 받는다. 최소한 절차적 공정성으로 정당성을 부여 받았다. 그래서인지 하고자 하는 의욕과 열정은 대단해 보인다. 일례로 매주 ‘사무국 주간 회의록’과 ‘주간 업무일지’가 코헴홈피 ‘임원자료실’에 공표된다.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매주 꼼꼼히 살펴본다. 투명성과 설명책임의 진일보한 사례라 할 수 있다.

업무분담에서는 사무국장의 조직의 총괄과 대외교섭을 필두로 이남일 간사의 회원지원업무, 손완호 간사의 회계업무, 주희 간사의 지원업무, 서용희 간사의 코헴의 집 업무, 이성재 비전임의 코헴의 집 지원업무가 안정기에 접어들었다(꼭 집어 이름을 거론해 주고 싶었다). 이들이 특별한 이타주의, 자기희생, 겸손이 함양되어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의무적으로 마땅히 지켜야 할 본분이란 직분에 충실하면 그만이다. 한때 불안한 층위에 흔들리고 내부 갈등, 동요도 있었지만 이만하면 상대적으로 잘하고 있다. 어쩌다 맡은 직책으로 인해 옆에서 깊은 곳까지 지켜본 필자로서는 안도감이 든다.

누군가 싫다고 해서 다른 사람이 자동적으로 좋아지는 건 아니다. 누군가 싫어지면 다른 사람을 쳐다보기는 하겠지만 그 시선이 곧 애정은 아니다. 극단적 증오사례를 적시하기는 했지만 다른 방식의 관심이라고 보면 애정으로 바꾸려는 그 나름의 매력이 있어야 한다. 사무국이 매력을 발산한다면 싫음에서 나오는 부정의 논리가 좋음이라는 긍정의 논리로 이어지고 비로소 일반 환우들까지 적극적 참여와 행동이 표출되는 법이라고 ‘달리는 말에 채찍’드는 심정으로 결론에 붙여 올린다.

빛과 그늘은 어디에나 있다. 세상 안에도 있고 자기의 삶 안에도 있다. 그늘보다는 빛을 사랑하고 밝은 곳을 찾아가는 것이 세상과 사람 사는 일의 당연한 순리다. 하지만 때로 세상의 그늘진 곳들을 눈여겨보는 일이 필요하다. 그 일을 사무국이 하고 있다. 다름 아닌 사무국이 그동안 날개 죽지를 펴보지 못한 삶이 푸덕이는 우리들의 둥지이기 때문이다. 따뜻한 시선으로 바로 볼 일이다. 이 지면을 통해 다시 한 번 사무국원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보태기) 이 글을 끝으로 혈우사회의 내부라 할 수 있는 코헴회에 관한 글은 갈음한다. 다음으로 외부(혈우재단, 의료진, 제약사)로 시선을 돌려보겠다. 지극히 개인적인 시선이라 헤모필리아 라이프측에서는 “글의 내용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맞지 않을 수도 있음을 밝힙니다. -편집자 주” 사족을 달아야 할 지 모르겠다.

[김영기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