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이 소생하기 시작한지도 꽤 되었다. 어지간한 봄꽃들은 벌써 지쳐 보인다. 이것들은 한동안 누그러들테고, 곧 뜨거운 공기 속으로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그곳에는 반드시 다른 이름의 꽃들이 피어난다.

눈에 띄지 않는 이 아름다운 유전이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시대의 환절기 속에서 빛을 응시한 화가들이 있다. 르누아르와 모네, 빛과 같고 꽃과 같았던 그들이 지고 난 자리에는 또 다른 이름의 꽃이 피었다. 그들의 이야기다.

■ 빛의 추적자들

1874년 프랑스 파리, <제 1회 무명미술가협회전>이 열렸다.

봄바람이 난 젊은 화가들은 답답한 아틀리에를 벗어나 해변에서, 들판에서 망막에 맺히는 대로 그려온 그림들을 이 그룹전에 늘어놓았다. 그들의 주체할 수 없는 창작열과 자유분방함은 기존의 양식적인 형태와 구도, 색채로 가둘 수 없었다.

기성 평단에서는 이들의 전시를 비양식적인 치기 정도로 폄하했지만, 이들의 등장에 매료된 사람도 있었다. 훗날 인상주의로 명명된 화가집단의 등장에 한껏 고무된 한 평론가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결국 화가는 눈이 아닌 마음으로 보이는 것을 그려야 할 것"이라는 한층 급진적이고 예지적인 주장까지 하기에 이른다.

젊은 시절의 르누아르와 모네는 함께 빛을 찾아다니며 서로 같은 대상을 함께 그렸다. 르누아르의 색채와 선은 점차 주관적인 감성이 첨가되어간 반면, 모네는 좀 더 정확한 빛의 모습을 응시하기로 한다.

<라 그르누예르>를 비교해 보면 이 시기의 모네가 실제 망막에 맺히는 빛을 포착하는데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잘 알 수 있다.

■ 르누아르 - 빛의 여정, 형태에 도달하다.

첫 번째 그룹전 이후로 르누아르의 다소 주관적인 빛의 탐구는 한동안 계속된다. 하지만 당시의 평단은 아직 빛의 그림들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못했다.

르 피가로紙는 르누아르의 <햇살속의 누드>에 대해 “부패한 시체에 나타나는 푸른 반점이 보인다”며 조롱했다.

빛은 그자체가 아닌 피사물의 형태에 의해 완결된다는 믿음을 조금씩 키워가던 르누아르는 1881년 이탈리아로 여행을 떠난다. 그곳에서 라파엘로, 앵그르 등의 그림에 영감을 받은 르누아르는 빛과 형태의 새로운 균형점을 찾아간다.

이때부터 르누아르의 화폭은 실내광을 수용한다. 그의 모델이 된 여자들도 옷을 입거나 벗거나, 르누아르를 따라 점점 실내로 걸어 들어온다. (명성을 쌓게 된 르누아르는 집안에 많은 몸종과 가정부를 두었는데, 그녀들은 르누아르의 캔버스 앞에 서기 위해 -때론 눕기 위해- 부단히 애썼다)

형태에의 탐구가 막바지로 치닫고 있던 르누아르는 류마티스 발병으로 섬세한 터치 대신 드로잉에의 의존도가 높아진다. 류마티스가 악화되어 붓을 쥘 수 조차 없게 되자 붕대로 붓을 동여맨 채 필사적으로 그림을 이어간다.

그런 르누아르를 위해 아들 '장'은 물감을 짜주고, 정물들을 이리저리 배치해가며 곁을 지켰다. 하지만 아들 장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그림이 아닌 영화였다.

만년의 르누아르가 입버릇처럼 하던 말은 “이제야 그림을 알 것 같다”는 말과 “영화는 예술이 아니다” 라는 말이었다. 르누아르는 아들 장에게 그림을 전수시키고자 고집했지만 아들 장은 기대를 져버리고 입대를 한다.

■ 모네 - 빛을 얻고 시력을 잃다

8차례의 그룹전을 치르는 동안 일련의 인상주의 화가들이 그룹을 이탈해 갔지만, 모네만이 빛과 순간의 인상을 포착하는 것에 점점 몰입해 갔다. ‘진정한 인상주의자는 모네뿐이다’ 라는 평가의 이유이기도 하다.

모네는 허공을 감도는 빛의 입자들을 여백 속에 포획해 갔으며, 산업화로 한층 분주하게 돌아가는 도시의 일상을 포착하는 것에서도 즐거움을 느꼈다.

이런 모네의 캔버스 앞에 순종적이고 가려린 한 여인이 서게 된다. 그녀는 바람이 부는대로, 공기의 흐름대로, 빛의 흐름대로 떠다니는 듯했다. 까미유 동시외와 함께 한 시절 모네의 그림은 어느 때 보다 밝은 빛으로 가득 찼다. 하지만 모네의 젊고 아름다운 아내 까미유의 자궁에는 암이 자라고 있었다.

자궁암과 힘겨운 싸움을 하던 까미유는 죽음을 얼마 남기지 않고 살아서의 마지막 모델이 된다. (까미유의 임종 직후, 모네는 시신을 앞에 두고 <까미유의 죽음>을 그린다. 까미유는 원했을까)

화면속의 까미유는 빛과 공기 속으로 벌써 떠나고 있는 듯하다. 화면 좌중앙의 하얗고, 밝고, 깊은 그곳에 ‘영원’이 있는 것 같다.

까미유가 죽고 모네는 후견인이었던 오시데의 부인 알리스를 두 번째 부인으로 맞이한다.

오시데가 파산한 후 잠수를 탔기 때문인데, 모네는 은혜를 잊지 않고 알리스와 그녀의 자녀들을 부양하기로 한다. 모네가 다른 여인을 모델로 세우는 것을 극히 싫어했던 알리스는 자신의 딸 수잔을 모네의 캔버스 앞에 세우고. 모네는 <양산을 든 여인>을 그렸다.

까미유가 세상을 떠나고, 알리스와 재혼한 모네는 지베르니 정원에서 여생을 보낸다.

지베르니 시절의 <수련> 연작들을 보면 그 무렵의 모네는 이제 ‘빛나지 않는 빛의 심연’을 보기 시작한 것 같다. 모네의 시선이 깊어가는 만큼 아이러니하게도 백내장은 점점 악화되어가고 있었다.

■ 유전의 법칙 1 - 화해

전쟁이 끝나고 제대한 장 르누아르는 프랑스 리얼리즘 영화의 거장이 된다.

장은 아버지의 회화적 탐미의 그늘을 벗어나고자 몸부림쳤지만, 영화 속 대상의 시각적 배치를 중시하는 미장센 영화의 선구자로 평가 받기에 이른다. 그리고 화가가 되길 바랐던 아버지 오귀스트에게 경의와 화해의 메시지를 담아 영화 <풀밭 위의 점심식사>를 만든다.

캔버스에서 스크린으로 옮겨갔을 뿐. 두 부자는 그렇게 화해하며 새로운 시대를 이어갔다.

■ 유전의 법칙 2 - 열정

평생에 걸쳐 빛을 응시했던 노년의 모네는 누적된 자외선의 공격으로 시력을 잃어갔다.

그 동안에도 류마티스와 투병중인 르누아르가 붓을 놓았다는 소식은 없었다. 이제 시력을 거의 상실했지만 모네도 붓을 놓지 않았다. 그리고 50년 전 보들레르가 했던 말처럼 마침내 ‘마음으로 보는 것’을 그렸다.(샤를 보들레르가 처음 등단한 것은 詩가 아니라 미술평론이다)

잭슨 폴록의 것이라 해도 믿을 만한 <일본풍 다리>는 이후 전성기를 맞이하는 추상표현주의의 형태적 밑거름이 된다.

시대의 주도권을 놓고 다툴 것처럼 보였던 미술과 영화의 차이, 단절된 듯 한 르누아르 부자의 갈등은 ‘존중’과 ‘화해’로 지금까지 각자의 분야에서 빛나고 있다.

그리고 어쩌면 모네는 시력을 잃지 않았다. 그림을 그리지 않았던가. 그 자리에 그렇게 새로운 꽃이 피었다.

우리의 한국 혈우사회도 본격적인 치료환경을 갖추기 시작한 지 30여 년이 지나고 있다 한다. 구식이긴 하나 '한 세대'의 구분을 30년이라고 했을 때 우리 또한 새로운 혈우세대를 낳아 길러 무대의 한가운데로 나아가도록 하고 있는 시기인 것이다.

이 시기를 통해 우리는 과연 치료를 넘은 치유의 시대로 나아가고 있는지, 화해와 열정이라는 유전법칙에 부끄럽지 않게 우리의 세대를 이어가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보아야 하겠다.

[칼럼니스트 김장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