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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혈우병치료 1세대'를 만나다한국혈우재단 최용묵 상임이사 전격인터뷰
김태일 기자  |  saltdoll@newsfinder.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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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3.06  09:5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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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혈우병 치료는 80년대 지역별 종합병원 소아과를 중심으로 각개전투식 치료가 이루어지다 80년대 중순 국산 치료제가 개발되고 91년도 한국혈우재단이 설립되면서 본격적인 전기를 맞게 됐다고 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많은 의료진과 환우들, 부모세대의 헌신과 노력이 있었고, 그 뿌리를 잘 알지 못한다면 현재의 발전방향을 이야기 하는 것도 반쪽짜리 의미만을 담게 되지 않을까 싶다. 오늘은 한국 혈우병 치료의 불모시기와도 같았던 70년대 미국으로 건너가 혈우병 치료를 익히고 와 우리나라 혈우사회의 토대를 이룬 '1세대 혈우의사' 중 한 명인 최용묵 한국혈우재단 진료담당 상임이사(전 이사장)을 만나 오래되었지만 소중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 최용목 한국혈우재단 상임이사, 혈우병치료가 시작됐던 지난 1960년대 부터 지금까지 혈우병 환자의 진료가 이어지고 있다. 혈우병의 역사는 그를 혈우병 치료 의료인 1세대라 부른다.

1. 소개말씀 부탁드립니다.

1967년 서울대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작년이 졸업한지 50주년이었으니까 나이는 좀 먹어죠. (웃음) 69년에 미국으로 건너가서 뉴저지 의과대학에서 소아과를 전공하고 74년 코넬대학의 혈우병센터에서 소아혈액종양학까지(국내의사 최초) 전문의 코스를 밟으면서 본격적으로 혈우병 진료를 보게 됐어요. 코넬대 혈우병센터는 미국에서도 손꼽히는 큰 규모였는데, 지금은 자동화 설비가 다 해주지만 당시에는 응고인자 수치 검사까지 손으로 직접 해야 해서 그런 숙련된 기술을 거기서 다 배울 수 있었습니다. 그러다 82년 11월에 경희대학교에서 초청이 와서 한국으로 귀국을 했고 그 뒤로 우리나라 혈우병 환자들을 많이 치료할 수 있었죠. 당시에 한국에서 혈우병 치료를 하시던 분이 연세대에 김길영 교수님이 계셨는데, 그분이 88년? 89년인가에 혈우병치료를 하는 의사들 모임을 가져보자고 제안을 해서 이항 선생님, 황태주 교수, 이건수 교수 이렇게 같이 모여 연구도 하고 경험도 나누고 했습니다. 그리고 91년도에 허영섭 회장(녹십자 초대회장)이 혈우재단을 만들 때에 관여를 하게 됐죠. 돌아가셨지만 허 회장이 제 중학교 1년 선배거든요, 귀국을 하고 몇 달 있으니까 그분이 점심 한 번 먹자고 전화가 오더라구요. 당시엔 혈우재단을 만들거라고는 생각도 못하고 있었는데 이야기가 차츰 진행되면서 재단 설립까지 가게 된 거였죠. 그러면서 더 본격적으로 혈우병 치료에 다가서게 된 것 같습니다.

2. 혈우병 환자를 처음 진료보신 건 언제인가요?

서울대병원에서 67년도에 인턴 할 때에요. 홍창의 선생님이 66년인가 67년부터 혈우병 환자를 등록하기 시작한 것 같은데 그때 당시에 200명 정도가 있었던 것 같아요. 당시에 치료제가 없어서 별로 해 줄 수 있는 건 없었고 혈장을 주사하는 것 밖에 못했어요. 근데 혈장 1cc에 응고인자가 1IU 들어있잖아요? 그러니까 지혈하려고 600IU를 넣으려고 하면 혈장 600cc를 주사해야 하는데 심장에 부담이 가서 그렇게 놓을 수가 없는 거죠. 제가 미국 가서 혈우병을 공부한 것도 그래서 그랬던 것 같아요. 한국에선 할 수 있는 게 없는데 미국 가니까 ‘헤모필’, ‘코나인’ 같은 혈우병 농축제제가 있던 거라. 당시에 백혈병 치료제도 미국에서 만들기 시작한 게 69년도 정도였는데 어떻게 시기가 맞아서 과도 내과에서 소아과로 바꾸고 그쪽 공부를 했죠. 한국에 돌아왔는데 그때까지도 치료제가 안 들어오고 있어서 제가 적십자에 ‘크라이오’를 만들어 달라고 부탁을 해서 그걸 쓰기 시작했죠. 그 이후에 녹십자에서 나온 게 ‘AHF’라고 있었고요. 근데 그것도 본인부담으로 맞으려면 비용이 엄청나서 힘들었죠.

▲ 우리나라에 혈우병 치료가 정착되기 시작했던 시절, 그의 역할은 국내 혈우사회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3. 미국의 혈우병 치료는 또 어떤 차이가 있었나요?

미국이 약품은 먼저 보급했지만 건강보험 면에서는 우리보다 한참 어려운 면이 있었어요. 유명 사립병원에서 치료하려면 돈이 너무 많이 들어서 가난한 혈우병 환자는 주로 공립병원으로 가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공립병원에서의 적자는 정부에서 메워주기도 하고, 하여간 병원마다 경제적인 편차가 너무 심해요. 어떤 개인병원들은 불법인데도 의료보호 환자들을 일부러 병실 없다고 안받고 돌려보내고 그럽디다.

4. 한국에서 진료 보시면서 기억에 남는 환우가 있으시다면?

너무 많아서 그렇지만... 거의 초창기에 본 환자가 여기 재단에 근무하는 우종완씨였어요. 초등학교 6학년때였나? 근데 가족력을 몰라서 종완씨 동생이랑 사촌들 다 불러서 검사를 해서 환자를 찾아냈죠. 형제들 여럿이 아픈데 누가 환자인지도 모르고 하니까. 게다가 아픈 다리에 침을 놔가지고 땡땡 부어서 그거 치료하느라 애를 먹었죠. 치료제도 크라이오 밖에 없어서 그걸 가지고 거의 치료제 겸 유지요법까지 해가면서 많이 썼어요. 그런 덕분인지 경희대병원 환자들을 장애가 거의 없는데, 종완씨는 이미 관절이 좀 아픈 상태에서 만나서 안타까웠죠.

또 생각나는 게... 이름이 잘 기억 안 나네. 이 친구가 태어나기 전에 위로 형제가 7남매 있었는데 막내 외동아들이 이유도 잘 모른 채 1살만에 죽은 거에요. 나중에 알고보니 뇌출혈이었지만. 그 이후에 이 엄마가 마지막으로 이 친구를 임신했는데 집에 사내아이가 있어야 하니까 노산이어도 무조건 낳아야 한다는 거에요. 저는 혈우병이라고는 생각도 안하고 다른 유전병이라고 생각해서 예정일 가까워 오니까 입원을 시켜서 안전하게 출산시키고 이것 저것 검사를 했죠. 다 괜찮은 거라. 그런데 간호사가 그러는 거에요. ‘주사를 놨는데 피가 계속 흐른다’고. 그때 깜짝 놀랐죠. 이거 혈우병이구나. 검사 해보니까 맞더라구요. 그때부터 이 친구를 치료하기 시작했죠. 태어나기 전부터 알기 시작해서 자라는 과정 다 보고 이제 서른 서넛 돼서 곧 장가도 간다고 하니까 기분이 이상하더라고요. 장애도 없이 잘 컸어요.

▲ 한국혈우재단 최용묵 상임이사

5. 한국의 혈우병 치료, 어디쯤 와있나요?

저는 세계의 다른 나라들과 비교해서도 탑클래스 수준에 와있다고 생각합니다. 약품의 공급이라든지 환자의 건강상태, 사회적으로 받아들이는 인식도 좋습니다. 환자를 위한 구체적인 프로그램에 대해서는 제가 말씀드리기 적절치 않은 위치인 것 같고, 의료적인 부분에 있어서는 아주 우수하다고 얘기할 수 있겠습니다. 약품 사용량도 세계 3, 4위 수준이고, 국제 혈우병 학회에 가서 현황을 들어봐도 혈우병 치료제를 생산하는 자국 기업을 가진 나라가 손에 꼽을 정도에요. 그런 부분도 높이 평가할만 하죠.

6. 혈우병 환자가 주의해야할 다른 질환들이 있다면?

[영상] 최용묵 상임이사는 혈우병 환자들이 출혈관리를 하는 것 이외에도 치아 관리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7. 혈우재단의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은?

지금과 똑같죠. 좀 더 좋은 방향으로. 올해 캐치프레이즈 같이 ‘나누는 삶, 더 좋은 삶’이 방향이라고 생각해요. 재단의 한 해 캐치프레이즈는 연말에 재단 직원들을 대상으로 공모해서 결정하고 시상도 하는데, 올해 ‘나누는 삶, 더 좋은 삶’은 광주재단의원의 채정현 간호사가 내놓은 아이디어였어요.

8. 진료시간 외에 평소 시간은 어떻게 보내시나요?

별로 하는 게 없는데?(일동 웃음) 주로 외부에서 자문 들어오는 것에 대해서 답해주는 일을 많이 해요. 소아과 의사기도 했지만 한국혈액학회와 암학회 이사장을 지내다보니까 그런 쪽으로 자문을 구해오는 경우가 많거든요. 요샌 외국에서도 의료자문이 많이 들어오고요. 취미라고 할 만 한 건 없어요. 예전엔 골프도 많이 치고 했는데 안 친지가 벌써 십년이 넘어요. 게을러서 그래요.(웃음)

▲헤모라이프 편집팀은 최용묵 상임이사를 만나 혈우병 치료의 역사를 되짚어보는 자리를 가졌다.

9. 가족은 어떻게 되세요?

집사람하고 1남2녀. 손주가 다섯 그래요. 큰 손주가 대학 다니고 고딩이 세 녀석, 막내는 중학생이고요. 다 컸죠. 큰 손주한테 의학쪽으로 해보라고 했더니 안한다고 자기는 화학이 좋다고 바이오 융합과학인가 공부하고 있어요. 연세대 스키부 동아리를 한다는데 장비하고 뭐하고 돈이 많이 들어간대요. 근데 거기 들어가면 동아리 회장이, 집에 손 벌리지 말고 자기 손으로 그런 비용 다 마련하라고 시킨대요. 그래서 지가 학생들 과외하고 아르바이트 해서 마련하더라고. (기자 : 손주들하고 얘기를 많이 나누시나 봐요.) 그럼요. 제가 밥을 얼마나 사주는데요. 다 나만 찾지.(일동 웃음) 집사람도 저랑 같은 학교 동문인데 의사는 아니고요.

10. '연기자 최정윤씨가 따님 아니냐'는 얘기가 있었는데...

아니에요.(웃음) 그게 왜 그랬냐면, 대전고등학교 5년 후배가 하나 있는데 나랑 이름이 같아요. 엘리베이터 회사 사장인데, 그 딸이 최정윤씨 더라고~ 그러니까 최정윤 아버지 이름이 대전고 나온 최용묵 이렇게 된 거죠.(일동 웃음) 나이도 비슷하고 하여간 그것 때문에 웃긴 일들이 많았죠. 그 아버지는 인물은 별론데 딸(최정윤)은 예쁘더라고요.(웃음)

11. 받아본 선물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 있다면?

글쎄요... 그렇게 기억에 남는 것이... 미국에서 레지던트로 일할 때, 거기서는 선물 같은 거 잘 하지도 않는데, 한 번은 백혈병 치료해 준 이탈리아계 미국인이 있었어요. 진짜 고맙다고 눈물 흘리면서 그 사람이 만년필을 선물해 준 적이 있었어요. 그게 기억이 남고, 또 하나는 그것도 미국에서 백혈병 치료해준 학생이 하나 있었는데, 나중에 한국에 들어온 뒤에 국제우편이 왔더라고요. 자기가 존스홉킨스 의대 들어가게 됐다고 덕분이라고 긴 편지를 받았죠. 그런게 기억에 남네요. 백혈병은 혈우병하고 다르게 완치가 되잖아요. 3년에서 5년 동안 함께 고생하고 사느냐 죽느냐 결정이 나니까 완치된 사람들은 마음이 그럴 수 밖에 없는 것 같아요. 치료한 의사도 그렇고.

▲ 평생 건강관리를 해야 하는 혈우병, 그리고 생과 사를 오가는 백혈병. 질환에 따른 차이는 분명하지만 그의 치료 열정은 남달랐다.

12. 종교 있으세요?

지금은 안 다니지만, 천주교. 왜 다니기 시작했냐면, 한국전쟁때 피난을 갔는데 거기에 프랑스에서 오신 신부님이 계셨어요. 굉장히 훌륭한 분이셨는데 그 신부님 덕에 성당에 나가게 됐죠. 중학교 때 세례도 받았고요. 그때 보좌신부가 누구였냐면, 드봉 신부님. 나중에 안동 교구장도 하시고 지금은 은퇴하셨는데, 드봉 신부님도 제가 참 좋아했고. 우리 대전 본당신부는 오기선 신부님. 나중엔 절두산성지 신부 하시다가 돌아가셨는데 다들 대단하고 좋은 분들이셨죠. 저희 부모님 묘소도 대전 천주교 묘역에 계세요. 제 세례명은 ‘바드리시오’.

13. 여행 가보셨던 중에 인상적이었던 곳이 있다면?

스위스가 좋았던 것 같아요. 자연경관도 너무 좋고 사람들이 정말 행복해 보입디다. 의료복지도 잘 되어 있고요. 다만 고도의 의료기술은 조금 떨어지는 것 같아요. WHO 사무총장 했던 이종욱 박사가 뇌출혈로 쓰러졌는데, 한국으로 왔으면 살았을텐데 스위스에서 수술 받고 돌아가셨잖아요. 안타까웠죠.

14. 우리 환우들에게 응원의 한마디 부탁드립니다.

자기 건강은 자기가 위하는 것이지 남이 위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을 갖고 남한테 뒤지지 않고 건강을 유지할 수 있도록 노력하면서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그게 제일 좋죠.

[영상] 최용묵 상임이사는 "환우들의 자기 건강은 남이 지켜주는게 아니라 자신이 지켜 나가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왠지 무뚝뚝해 보이는 첫인상과 달리 최용묵 상임이사는 소아환자들 이야기, 미국에서 만났던 백혈병 아이들 이야기, 손주 이야기를 할 때 가장 환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천생 소아과 의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귀한 시간 내어 값진 이야기, 진지한 의견을 들려준 최용묵 상임이사께 진심어린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헤모라이프 김승근 주필/ 김태일 기자/ 유성연 기자/ 사진영상=황정식 기자]

▲ 인터뷰를 마친 후, 최용묵 이사는 벽에 걸린 "나누는 삶, 더 좋은 삶"이 담고 있는 의미를 설명했다. 국내 혈우병 치료 1세대인 그가 앞으로도 오랫동안 의료현장에서 환우들을 치료해 주기를 기대한다. 사진은 좌측부터 김태일 편집장 유성연 기자 최용묵 상임이사 김승근 주필 / 사진 황정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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