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가 잘 멎지 않아 ‘희귀질환’이라는 딱지를 달고 살아야 하지만, 혈우 환우들은 교육을 통해 스스로 처치법을 익히면서 일상적인 모습으로 자신을 만들어 간다. 정기적으로 유지요법(예방요법)을 하면서 일반인들과 별다를 것이 없게 평범한 삶을 누리고자 위해서이다. 어떤 질환이든 치료법이 없을 땐 삶의 질이 매우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나마 다행인 혈우병은, 오랜 세월에 거쳐 최신의 치료법이 도입되었고 재가·자가치료가 가능해지면서 삶의 질도 점차 개선되어 왔다.

혈우사회 안에서는 환우회는 신환(새로운 환자)에게 “일반인들과 큰 차이 없이 삶을 영위해 나갈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주고 그 부모에게도 큰 부담을 덜어준다. 이렇게 만들어지기까지는 환자와 환자부모를 비롯해서 국가의 시스템과 민간 기업의 참여가 큰 몫을 감당해 온 덕이다. 물론 갈등과 대립이라는 흑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성장통을 겪는 과정에서는 이같은 흑역사조차 지금의 환경을 만들기 위한 디딤돌로 이해하는 것이 편할지도 모르겠다.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혈우병 환우들을 비롯한 희귀질환자들은, 마음 속에 일종의 ‘보상심리’가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수 십년동안 어둠 속에 갇혀있던 자신의 그림자만 바라보다가 이제는 조금씩 희망을 가지며 사회 환경적 어드밴티지(Advantage)를 기대해 보기도 한다. 특혜가 아닌 혜택이 있어야 한다는 거다. 이같은 기대를 비난해서는 안 된다. 혹자는 능력도 안 되는 사람이 나설 때, ‘病身六甲’이라며 손가락질에 조롱질까지 하는 자들이 있다. 환자들이 무지몽매(無知蒙昧)해서 일까? 천만의 말씀이다. 억울하게 보내야 했던 그 오랜기간을 지나서 이제 좀 기지개를 펴고 싶을 뿐이다.

희귀질환이라는 게 자신이 원해서 가지게 된 것도 아니고, 태어나면서부터 질환을 가지고 태어났다. 이미 기울어진 운동장에 덩그라니 떨궈진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더해 혹독한 통증이 더해졌다. 이를 놓고 ‘과거의 업보’라 말한다면 차라리 말이나 않겠다. 알 수 없는 일이니 말이다. 그러나 ‘선천적 유전질환’은 논란의 여지없이 자취(自取)한 게 아니다. 따라서 각자 주어진 삶 중에 상당기간동안 제한을 받았다면 누구나 그 보상심리를 기대한다는 것은 죄가 될 수없다.

복지를 이야기하는 위정자(爲政者)들은 ‘희귀질환자들을 사회적 약자로 배려해야한다’며 일반인들 사이에 합의를 이끈다. 과도한 욕심일지는 모르겠으나, 희귀질환자들은 이러한 말조차 듣기가 거북할 때가 있다. 인간으로써의 행복할 권리를 말한다면 환자들이 투쟁하지 않더라도 국가는 당연한 사회보장 시스템 만들어야 한다. 국가가 국민을 지켜야 할 당연한 임무처럼 말이다.

그러나, 이 사회는 비상식적인 일들이 곳곳에서 발생되고 있다. 시대에 따라 무죄가 유죄가 되기도 하고 유죄가 무죄가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런 건 사회의 ‘상황적 이해’때문에 발생되는 현상이다. 법은 그 태생의 조건이었던 도덕과 윤리를 배척(排斥)해서는 안 된다. 다시말하자면 법은 도덕이라는 선천적 유전으로 인해 만들어진 결과물이고, 모든 이들이 이를 따라야 하는 절대적 가치이다. 따라서 법은 상식을 벗어나면 존재가치가 사라진다.

혈우병을 이해하는 보건당국에 매우 비상(非常, 비정상적)한, 법적 또는 행정적 오류가 존재한다.

정부의 ‘희귀·난치성질환자 의료비 지원사업’이 있다. 복지부에 따르면, 이 사업은 “의료비의 경제적 부담이 과중하여 가계의 사회·경제적 수준 저하가 우려되는 희귀·난치성질환자에 대해 본인부담 의료비 지원을 통하여 대상자와 그 가족의 사회적·경제적 심리적 안녕을 도모하고 국민건강 및 복지수준을 제고한다.”고 한다. 매우 중요한 사업이고 점차 그 대상이 넓어져야 한다는 것에 지극히 동의한다. 희귀질환을 앓고 있는 환자들이 이 사업으로 많은 부분 의료비경감을 받고 있다.

보건당국은 133개 희귀난치성질환에 대한 2018년도 의료비지원사업 기준을 마련해 공지했다. 혈우병의 경우도 이 지원사업의 대상 질환이다. 그런데 이 사업은 소득과 재산을 조사해 지원 사업대상에서 제외를 시킨다. 또한, 부모 등 부양의무자의 소득과 재산까지도 살펴보고 초과시 지원대상에서 제외시킨다. 여기까지만 보면 특별히 문제가 될 만하지는 않겠다고 생각할 수 있다. 소득이 높으면 자가 치료비를 분담할 수 있다고 해석되니까.

그런데 이 사업이 정착되기 전에 혈우사회는 국가에서 하지 못하는 일을 민간사업으로 치료의 시스템을 완성해 놓고 있었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혈우병으로 태어났다면 소득이나 재산의 유무와 관계없이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혈우사회 네트워크를 갖췄다는 거다.

2000년 무렵, 보건당국은 이같은 혈우사회의 민간사업 제도를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고 ‘희귀·난치성질환자 의료비 지원사업’을 시범사업으로 시작하면서 ‘소득과 재산조사’ 따위는 애초부터 진행하지 않았다. 그러나 사업이 시행된지 몇 해를 지나면서 형평성을 따져가며 탈락기준이 마련되었고, 소득과 재산의 기준도 점차 옥죄기 시작했다. 혈우사회는 자구책으로 ‘사업지원 탈락자’에 대한 일부지원을 다시 마련했지만, 지금까지도 완성되어 있던 그 시스템으로는 복귀하지 못하고 있다. 즉, 지원사업에서 탈락된 환자들은 의료비 지출을 지속적으로 감당해야 한다. 더구나 지원사업 적용대상자들 조차도 국가에서 ‘소득과 재산조사’를 정기적으로 실시하면서 지속적으로 ‘탈락’시키고 있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기초생활보장법’에 근간이 됐던 소득기준과 재산기준을 ‘희귀·난치성질환자 의료비 지원사업’ 재산과 소득조사로 가져오면서 당초, 기초생활보장법 소득과 재산기준에 600% 400%를 적용했던 기준이 점차 하향화되면서 금년에는 120%~240% 기준적용으로 떨어졌다. 이에따라 도시근로자 평균소득쯤 되면 의료비 지원대상자에서 제외가 된다.

희귀질환자가 의료비 지원사업 대상자에서 제외가 되면, 월평균 고정 치료 지출비가 상당할 뿐 아니라 비용지출에 대한 부담으로 인해 치료기피 현상이 발생된다. 차라리 치료를 하지 않겠다는 환자가 늘어난다는 거다. 그렇게 되면 지금까지 만들어져왔던 치료환경이 다시 악순환 될 수밖에 없다. 보건당국은 ‘희귀·난치성질환자 의료비 지원사업’으로 절약(?)했던 예산을 수급 장애인이 된 희귀·난치성질환자 의료비용으로 고스라니 지출해야 할 것이고 경제활동을 했던 환우들이 비경제인으로 수급자가 될 것이 눈에 훤하다.

이런 비상식적 행정으로 혈우사회는 비상의 덫에 걸린 셈이다. 가지고 있던 걸 나눠 갖게 되면 다수로부터는 지지받을 수 있으나 혈우병 환우는 박탈당한 것이다. 그 누구에게도 쉽게 이해시키기 어려운 덫이다.

[헤모라이프 김승근 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