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테니스 역사를 다시 쓴 정현 선수. 그는 국내 최초로 메이저대회에서 4강 신화를 달성했다. 불꽃같은 질주가 진행되면서 승승장구했던 정 선수는 결승진출을 앞두고 왼쪽 발바닥 부상이 심각해지자 메디컬 타임 후 기권하게 됐다.

그는 대회를 마치고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16강전부터 계속 진통제를 맞으며 시합을 했다면서 마지막 경기에서는 진통제가 통증을 못 잡아줘서 더 이상 시합을 할 수가 없었다고 밝혔다. 4강의 신화는 이렇게 모진 통증을 겪어가며 만들어졌다.

그가 얻어낸 값진 결과는 한국을 넘어서 아시아 테니스가 세계정상에 설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했다. 22세 약관임에도 호주오픈 4강에 진출한 선수. 정현 선수는 그들 가운데 가장 나이가 어렸다.

# 그렇다면 혈우병 환자들의 삶은 어떠했는가? 숱한 통증의 나날이 이어지고 정신 줄까지 내려놓고 혼이 나간건지 육이 나간건지, 내가 나인지 네가 나인지 조차 구분하기 힘들 정도. 진통제라는 온갖 진통제를 다 먹어봐도 무용지물. 사람이, 한 두 시간의 통증조차 이를 물고 참는 것은 상상조차 힘들다고 하는데 하물며 며칠 동안 이어지는 통증을 견뎌야 하는 것은 숨조차 붙어있는지 확인하기도 어렵다. 이런 고통은 당사자도 힘들고 옆에서 지켜보는 가족들도 힘들다.

치료제가 나왔다는 건, 운명이다. 실로 감격할만한 ‘삶의 전환’이다. 링거 형태로 수 시간에 걸쳐 투여해야 했지만, 그것은 희망이었다. 통증으로부터의 자유를 얻는다는 것.

세월이 흐르면서 편리성이 한층 높아졌다. 수 시간 주사해야 하는 치료제가 이제는 고작 몇분이면 투약이 끝난다. 나아가 이제는 ‘예방’이라 불리는 보충치료요법이 일상화되고 있다. 숨쉬기조차 힘에 겨워했던 환우들은 이제 통증이라는 고통의 시간을 끊어냈다. 혈우병 환자들에게 치료제가 얼마나 중요한지 귀한 것인지, 치료제를 ‘생명’이라 표현하는 것은 환우들에게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이다.

# 최근 환우들의 삶이 개선이 되었다. 앞선 그 고통의 끈이 일단락됐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통’이라는 것은 ‘절대평가’인 게 결코 아니었다. 과거를 이야기 하는 것은 지금의 어린환우에게는 결코 위안이 될 수 없으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개념이 전혀 다른 ‘상대적’ 입장에서 시선을 바라봐야 한다.

선배 환우들이 흔히들 ‘지금 많이 좋아졌다. 예전엔 치료제 맞기도 어려웠다’라고 하지만, 그런 말들은 스스로 세대 차이를 가중화시킬 뿐이다. 아방게르와 아프레게르의 사상과 가치관은 극명하다.

‘혈우병의 완치’라는 궁극적인 목표가 달성되지 않는 이상 우리 혈우사회의 의료환경 개선은 끊임없이 달려야 하며 그 속도는 가속화 되어야 한다. “이쯤이면 됐다”라는 것은 바로 ‘매너리즘’을 일컫는다. ‘매너리즘’ 속에 갇혀버리면 자승자박하면서 자가당착에 빠지게 된다. 즉, 목 마른자가 우물 앞까지 단박에 달려왔는데, 마음에 드는 두레박이 없다며 또 다시 두레박 찾아다니는 꼴이 된다. 결국 목 마른자에게 필요한 것이 ‘물’이 아니라 ‘두레박’이 되어버린 꼴이 돼서는 안 된다.

# ‘국민영웅’으로 등극한 정현 선수가 귀국 후, 앞으로의 계획을 묻는 언론에 대해 무엇이라 말했는지 생각해보자. 통증에 시달리며 결승진출을 포기해야했지만 그는 ‘통증을 치료하겠다’라는 단편적인 것을 목표라고는 말하지 않았다. 그는 ‘그랜드슬램 시상대에 서고 싶다’면서 다음 목표에 대한 포부를 밝혔다. 어쩌면 테니스 선수로써 너무나 당연한 목표다.

이렇듯, 지금의 우리 혈우사회는 ‘통증을 줄여가는 것’, ‘수월하게 치료하는 것’ 이런 것에 매달리면서, 자칫 ‘없애는 것’, ‘완치하는 것’ 이런 대명제를 잊지는 않았는지 환기해 보고, ‘완치’에 대한 갈망을 잊지 않고, 그 목표가 살아 있다면 ‘개선된 치료제’를 찾아야 하는 것인지, 완치의 길로 다가갈 ‘연구개발 투자’가 필요한 것인지, 이제 우리가 사용해야 할 열정의 용처가 이제는 자명하지 않은가?

[헤모라이프 김승근 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