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헴 여름캠프를 여러 해 참여해보면, 다른 날에 비해 첫날 프로그램은 상대적으로 기억에 잘 남지 않는 경우가 많다. 긴 여정으로 피곤해서이기도 하고 오랫만에 만난 다른 혈우가족들과 인사 나누다보면 정신 없이 시간이 가서 그런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올해 캠프의 첫날 저녁은 좀 달랐다. 군더더기 없고 임팩트있게 마음에 남는 시간이었다고 평가하고 싶다.

코헴회는 첫날 저녁프로그램으로 '알쓸참이'를 유일하게 배치했다. '알쓸신잡'(알아두면 쓸데없는 신비한 잡학사전)이라는 신조어를 '알아두면 쓸모있고 참신한 이야기들'이라는 제목으로 재치있게 바꿔붙인 것이다. 관심사와 연령대에 맞춰 동시에 4개의 세션이 진행되어 회원들이 선택해서 들을 수 있는 프로그램이었는데 각 세션 주제는 아래와 같았다.
◇'실제상황 CPR' : 심폐소생술 교육 (블루크로스 의료봉사단)
◇너는 내 운명 : 혈우 부모 심리치유 프로그램 (윤은정 심리치료사)
◇겟잇헬스 : 장년층 건강관리 교육 (부산대 신호진 교수)
◇비정상 회담 : 청년층 미국혈우재단 임원 미팅 (말리 웨튼 NHF 유스프로그램 담당자)

이것저것 다 들어보고 싶었는데 몸이 하나라 아쉬웠다면, 기사를 통해서라도 어떤 세션들이 어떻게 진행되었나 둘러보도록 하자.

▲ 세션 전 막간을 이용해 헤모라이프와 인터뷰를 갖고 있는 대만 참가자들

◆'실제상황 CPR' : 심폐소생술 교육

이번 심폐소생술(CPR) 교육은 지난 세계혈우인의날 행사에서부터 코헴회와 연을 맺어 온 '장기려박사기념 블루크로스의료봉사단'이 맡아 진행했는데, 봉사단 소속 임원과 학생들이 20여 명이 경남 양산까지 먼 거리를 마다않고 달려와 혈우가족들에게 1대1 교육을 해주었다.

블루크로스의료봉사단의 장여구 교수(서울 백병원)는 "심폐소생술은 5분동안의 빠른 판단력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면서 골든타임 내 심폐소생술 4단계 지침으로 ‘깨우고, 알리고, 누르고, 자동제세동기 사용’을 강조했다. 절박한 순간에 '나는 할 수 있다'는 마음 자세로 먼저 행동으로 옮긴다면 한 사람의 생명을 구할 수 있다는 것이 이번 심폐소생술 교육의 메시지였다.

교육을 끝까지 받은 한 어린이 회원은 "TV에서만 봤는데 직접 해보니까 떨렸다. 꼭 필요한때 써먹어야겠다"고 다짐을 발표하기도 했다.

▲ '애니'라고 불리는 CPR 실습인형으로 심폐소생술을 실습하고 있는 참가 환우들

◆너는 내 운명 : 혈우 부모 심리치유 프로그램

혈우병 환아를 키우고 있는 부모들을 위한 세션이었다. '유전질환' 혈우병을 가진 아이를 키우며 처음엔 당황스럽고, 절망스럽기도 하며 원망과 자책이 뒤섞여 엉킨 실타래를 풀지도 못한 채 가슴에 애증이 켜켜이 쌓이며 그렇게 한(또는 두, 세) 아이를 키워온 부모님들이다. 어떻게든 아이는 자라고 사회 속으로 녹아들지만 엉켜버린 부모의 마음은 그대로 남겨져 지나치게 딱딱해지기도 하고 모래처럼 푸스러지기 십상인 것이다. 그 마음을 서로 어루만져주는 자리였다.

▲ 둘러앉아 지나온 얘기를 나누고 있는 어머니들

참석자의 대부분이었던 어머니들은 힘들었던 치료 이야기, 첫 진단을 받던 날의 기억, 가족 안에서의 갈등 같은 것들을 쏟아놓으며 눈물도 함께 쏟았다. 혈우를 가진 아이에게만 치중해 나머지 한 아이에게 못다 준 사랑을 아쉬워하는 어머니도 있었고, 너무 힘들어 나쁜 생각까지 먹었던 한때를 떠올리며 가슴을 치는 어머니도 있었다. 경남에서 참가한 한 아버지는 엄마들끼리의 편한 대화를 위해 아이를 데리고 세션장을 나와 복도에서 두시간 가까이 아이와 놀아주며 기다리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공간을 벗어났다해서 아픔을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이 아버지도 지나온 시간들의 파고를 고스란히 함께 공유하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사회자가 많은 말을 하지 않았다. 참석한 어머니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맘 속 바닥까지 드러나도록 했고, 서로의 삶을 위로하고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눈물에 씻겨진 건지, 후반부엔 한결 밝고 가벼워진 얼굴들이었다. 마지막으로 아이에게 전하고 싶은 말을 그림으로 그리면서 마무리했는데, 거기에는 이런 메시지들이 들어가있었다.
"아들, 니 이름만 외치면 힘이 나" "내 아들로 태어나줘서 고마워" "기다릴게"

진행을 맡았던 윤은정 심리치료사는 "이렇게 강한 어머니들은 처음이고, 오히려 내가 많이 배우게 되는 자리였다"고 말하면서 "이런 어머니들과 함께 자란 아이들은 분명 나라를 구할 아이들일 것이다"면서 부모들을 응원했다.

▲ 한 참가자의 그림과 아들에게 전하고픈 한마디

◆겟잇헬스 : 장년층 건강관리 교육

한편 중강당에서는 부산대 신호진 교수가 진행하는 장년층 건강관리 강좌가 열렸다. 신 교수는 혈우환우의 고령화에 따라 수반될 수 있는 관절질환, 당뇨, 뇌출혈, 간질환 등 성인질환의 위험성과 대처방법을 상세히 교육했다. 특히 혈우환우들의 많은 수가 앓고 있는 C형간염에 의해서 간경화, 간암 등으로 악화되는 경우가 최근들어 늘어나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이에 대한 각별한 주의와 관리가 필요함을 역설했다.

강좌에 참여했던 서울지역의 한 장년 환우는 "수도인 서울에도 종합병원에서 치료받기가 어려운데, 자꾸 여러 질환이 문제되니 종합병원에서 혈우병도 많이 치료했으면 좋겠다고 느꼈다"고 소감을 전했다.

▲ 강좌를 진행하고 있는 신호진 교수

◆비정상 회담 : 청년층 미국혈우재단 임원 미팅

마지막으로 <비정상 회담>이라고 이름붙여진 세션에서는 이번 캠프에 참여한 다른 나라의 청년들과 한국의 혈우가족들이 모여 자국의 교육프로그램에 대해 발표하고 청년들의 솔직담백한 고민들을 나누었다.

미국혈우재단(NHF)에서 청년층 교육을 담당하고 있는 말리 웨튼(Marlee Whetten)은 NHF에 대한 전반적인 소개와 함께, 코헴사무국에서도 참여한 바 있는 NYLI(청년리더쉽프로그램)에 대해 안내했다. 말리는 NHF에서 항체환자, 10번, 13번 응고인자 결핍환우, 여성환자 처럼 소수 환자그룹에 대한 특별 교육프로그램도 운영하고 있다고 전하면서 폰빌레브란트결핍증을 앓고 있는 자신은 첫 생리때 9개월간 출혈을 겪었다는 경험을 말하기도 해 참가자들을 놀라게 했다.

▲ 미국에서 진행하고 있는 레드타이챌린지를 소개하면서 한국의 레드타이챌린지도 아주 모범적으로 펼쳐지고 있다고 평가하는 말리 웨튼 양(가장 뒤편)

미국의 여성 출혈질환자들은 이러한 공동의 경험을 바탕으로 스스로를 교육하고 사회적 지원을 이끌어내기 위해 별도의 웹사이트(victoryforwoman.org)도 운영하며 활동을 넓혀가고 있다고 했다. 또한 미래의 혈우병 완치를 위해 유전자치료 연구 등을 지원하는 위원회(MyLifeOurFuture)도 운영하고 있음을 발표했다.

말리의 당찬 발표에 힘입어 코헴회와 홍콩 환자단체도 단체현황과 주요사업에 대해 이야기하고 결혼과 건강관리 등 세계 혈우청년들의 관심사를 놓고 재기발랄한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 홍콩에서 온 앤디 씨는 홍콩환자단체의 활동 중 소식지 발행에 대해 설명했다.

▲ 웨튼 양이 세션이 끝나고 미국 여성출혈질환자들의 웹사이트를 알리는 뱃지를 나누어주고 있다.

▲ 비정상회담, 청년들의 지혜와 화이팅이 혈우사회를 이끌어주길 바란다.

이렇게 관심사별 여러 세션이 동시에 진행되는 교양프로그램은 몇 해 전부터 코헴 여름캠프에 자리잡기 시작해서 이제는 무척 성숙한 형태로 회원들의 다양한 요구를 충족시키고 있다.

[헤모라이프 김태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