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십자가 혈우병 유전자재조합제제 ‘그린진에프’의 미국임상을 전면 중단하고 중국임상에 집중하겠다고 공식 발표했다. 앞서 많은 이들은 국내 혈우병 치료제의 미국임상에 대해 큰 관심을 갖고 지켜봤지만 결국 미FDA 진출은 기약 없이 미뤄지고 말았다.

녹십자가 글로벌 전략을 수정한 것은, 투자비용 증가와 출시 지연에 따른 사업성 저하로 이어지기 때문에 미국 임상을 더 이상 강행하지 않기로 한 것이다. 반면 중국임상은 청신호가 켜진 상태라 임상뿐 아니라 벌써 매출까지 그 규모를 저울질하고 있는 상태이다.

미국시장과는 달리 중국시장은, 일단 ‘임상허가’는 ‘매출확보’라는 게 관련업계 종사자들의 중론이다. 따라서 녹십자는 미국임상이라는 명분보다는 중국시장 확대라는 실리를 택한 것으로 보인다.

◇ 탁월한 선택, ‘명분’보다는 ‘실리’챙긴 녹십자

애초 혈우사회전문가들은 ‘그린진에프’의 미국시장 진출에 반신반의 했다. 이미 미국이나 유럽에서의 혈우병 치료제들은 환자편의성을 높인 화이자의 ‘진타 솔로퓨즈’ 등과 같은 치료제들이 점령한 상태이기에 빈틈없는 시장이었다. 그러나 눈치빠른 이들은 ‘그린진에프’가 미FDA를 통과하게 되면 그 명분으로 국내시장에 유리한 고지를 확보할 것으로 조심스럽게 내다보며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나 미국임상은 만만하지 않았다. 임상군 모집계획이 더뎌지면서 동력을 잃었고, 더욱이 국내에서도 외국산 차세대 롱액팅(반감기가 긴) 치료제들이 줄줄이 출시를 앞두고 임상이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그린진에프’가 미국임상을 통과하더라고 이미 트렌드가 바뀐 상태가 된다. 따라서 미FDA 통과는 ‘실리 없는 명분 쌓기 밖에 안된다’는 게 전문가들의 한결같은 목소리였다.

이쯤되면, 녹십자의 이번 글로벌 전략 수정은 현실적 판단을 정확하게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중국시장에서 녹십자의 그린에이트(8인자 혈액제제)는 혈우병 전체 시장에 35% 이상 확보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고, 국제 혈우사회에서도 중국 환자들 치료에 큰 관심을 나타내기 시작하면서 그동안 치료를 못 받던 중국혈우병 환자들이 속속히 약물치료의 접근에 다가서고 있다. 이런 추세라면 중국시장은 향후 수 년 내에 3~4배 이상 시장이 확대될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녹십자 입장에서는 중국시장의 점유율을 높이는 게 매우 현실적인 판단이다.

녹십자의 혈우병치료제 파이프라인을 점검해보면 차세대 치료제가 상용화되기 까지는 최소 3년 이상의 기간이 필요할 것으로 보이는데, 3년 사이에 국내혈우병 치료제 시장은 또 달라지게 될 것이 자명하다. 이미 국제 혈우사회에서는 롱액팅 치료제가 출시되었고 또다른 차세대 치료제 개발계획이 공식화되고 있다.

◇ 녹십자, 왕의 귀환은 이뤄질 수 있을까?

혈우사회에서 녹십자가 화려한 ‘왕의 귀환’이 될 곳은 한국이 아닌 중국이 될 가능성이 높다. 단순히 매출규모만 따지고 보더라도 중국환우들의 수가 어마어마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국내에서는 이미 상당부분 샤이어에 발목이 잡힌 상태라 은신의 폭이 넓지 않다.

‘그린에이트’ 이후에 출시됐던 ‘그린모노’가 해외 수출판로의 길이 열렸더라면 녹십자는 특별한 허들없이 승승장구를 이어갔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린모노’는 샤이어(전신 박스터)와의 ‘조건부 계약’ 때문에 태생부터 애초 수출할 수 없는 상태(기술제휴)였다.

녹십자는 ‘그린에이트’ ‘그린모노’에 이어 ‘그린진에프’까지 순차적으로 향상된 혈우병치료제를 시장에 내 놓고는 있지만 아쉽게도 타이밍이 점차 뒤처지고 있다. 이런가운데 외국산 치료제에 국내시장을 빼앗기고 있는 양상이다. ‘울며 겨자먹기’식으로 타사의 경쟁약물을 판매해야 하는 상황이 이어지고 있다.

◇ 녹십자의 비전, 그것은 ‘글로벌 정책’

국내 혈우병 치료제 시장을 냉정하게 분석해 보면, 녹십자는 눈물 날 만큼 힘겨운 고전을 겪고 있다. 그러나 중국 등의 글로벌 정책으로 부분 만회를 하고 있는데 실제로, ‘그린에이트’는 국내에서 사라져가고 있는 제품이지만 중국시장에서는 날개 돋친 듯 꾸준히 성장하고 있다.

타산지석일지 모르겠으나 녹십자는 국내의 긴장국면이 오히려 글로벌로 확장하는데 주춧돌이 되고 있다. 어찌됐건 녹십자가 혈우병시장에서 살아남을 방법은 글로벌 시장에서 살아남는 방법밖에 없다. 이미 국내 혈우병 치료제 시장은 레드오션이 됐기 때문이다.

녹십자는 중국을 기반으로 한, 제3국가에서의 순항이 예고된다. ‘자체빅딜(국내 점유율을 줄이고 국제 시장에 점유율을 높이는 것)’이 성공을 거둘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미FDA 유럽EMEA 등을 일순간 통과하면서 광폭행보를 했더라면 좋았겠지만, 이미 국제혈우사회에 거목들이 버티고 있는 이상 그들의 협조는커녕 방해공작은 불을 보듯 뻔하다. 따라서 이번에 발표한, ‘글로벌 전략의 전면 수정’을 통한 점진적 게릴라행보는 글로벌에서 성공할 가능성이 높다고 볼 수 있다.

녹십자는 향후 국제혈우사회에서 명실상부한 기업으로 자리매김할 가능성은 더욱 높아졌다. 다만 녹십자에게 바람이 있다면 “뒤(국내시장)를 돌아보지 말고 앞(국제시장)을 향해 전진하라!”라는 것. 녹십자의 희망은 공격적인 글로벌 정책이다.

헤모필리아라이프 김승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