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혈우환우와 시민사회가 끝까지 함께 할 것이다!

감염 20년, 소송 10년, 희미하게 빛나던 희망

90년대 초반 HIV에 오염된 혈액으로 제조된 혈우병치료제(녹십자사 제조, 훽나인)를 투여하여 혈우환자 중 20여 명이 HIV에 감염되었다.

감염 환우들과 그 가족(16가구 68명)들은 2003년 녹십자를 상대로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제기하였고, 지난한 법정공방 끝에 대법원은 2011년 9월 29일 녹십자의 혈액응고인자제제와 혈우환우들의 HIV감염 사이의 인과관계를 인정하는 내용의 원고(감염환우들)승소취지 파기환송을 판결하였다.

2003년 1심을 시작으로 하여 2005년 2심(고등법원 항소심)에 들어갔고 2008년 3심(대법원 항고심)까지 이어진 것이다. 1심 결과는 원고(환우, 가족) 일부승소, 2심 결과는 원고 패소(녹십자제제 이외의 다른 약제를 투여한 경험이 있는 환우가 있고 소멸시효를 넘겼다는 이유)였으나, 대법원 판결에서 2심 결과를 파기하고 사건을 다시 고등법원으로 돌려보낸 것이다.

기존 1심, 2심에서 원고들에게 있었던 감염경로에 대한 증명책임을 완화하고, 혈액제제의 사용과 감염의 시간적 근접성, 통계적 관련성, 혈액제제의 제조공정, 해당 바이러스 감염의 의학적 특성, 원료 혈액에 대한 바이러스 진단방법의 정확성의 정도 등을 고려하여 판단한 결과였다.

또한, 대법원은 소멸시효의 기산점이 되는 ‘불법행위를 한 날’이란 가해행위가 있었던 날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손해의 결과가 발생한 날이 되어야 함을 밝히면서, 소멸시효가 완료되어 소송자체가 일부 무의미하다는 2심결과를 파기하고 재심리할 것을 주문했다.

눈 가리고 귀 막은 녹십자

그런데 사건을 파기환송 받은 고등법원 재판부가 본 사건을 판결이 아닌 조정으로 하기 위해 4차 조정까지 진행하였으나, 녹십자측은 ‘HIV감염은 에이즈 발병과 다른 개념’이라는 어이없는 논리를 고집하며 조정에 성실히 임하지 않고 있다. 그러면 제대로 된 판결을 받기 위해서는 에이즈 발병까지 기다리기라도 해야 된다는 것인가!

현재 HIV감염 혈우환자들은 면역력 저하를 막고 에이즈로의 전이를 피하기 위해 힘겨운 치료를 계속해나가고 있으며, 치료의 부작용으로 고통 받고 있는 환자들도 적지 않다. 또한 20년이 넘게 HIV를 가지고 살아오면서 여러 합병증이 수반되어 있는 상태이며, 병원에서의 수술 거부나 혈소판 기능 이상 등 기본적인 혈우병 치료에도 심각한 지장을 초래하고 있을 뿐 아니라 취업의 어려움과 결혼을 앞두고 오는 혼란 같은 사회적 고립 속에서 이중 삼중의 고통을 겪고 있다. 그리고 사건 해결이 길어지는 동안, 소송을 제기한 두 명의 감염환자가 건강악화로, 두 명의 환자가족이 노환으로 사망하는 안타까운 현실도 있었다.

소송인단을 포함한 혈우환자들은 이렇듯 생명윤리를 철저히 무시한 채 혈우병환자들을 약품판매의 대상으로만 여기는 녹십자의 현 태도에 분노를 금할 수 없으며, 사회적 편견과 건강문제 때문에 전면에 나설 수 없는 HIV감염환우들의 상황을 이용해 사건을 흐지부지 무마하려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게 하고 있다.

감염환자들, 세상 속으로 나서다

8월22일 있었던 변론준비기일에, 녹십자측 변호인단은 대법원 판결에 거론된 의료진들을 증인으로 신청하는 등 감염 인과관계를 부정하기 위한 주장을 하고 있으나 재판부는 ‘여러 요인들 중 하나가 불성립되더라도 인과관계가 추정 가능하다. 피고 대부분이 한국형 바이러스에 감염된 것이 인정되고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 또한 재판부는, ‘이제는 나도 어느 정도 입장이 정리되어 조정이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하며, 심리진행을 해나가며 화해권고를 할지 여부를 판단하겠다.’ 하였다.

이어 8월23일 가졌던 소송인단 모임에서 소송인단들은,

20년 동안 고통받아 왔고 10년 동안 소송해왔지만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라고 여긴다.

조정에도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던 녹십자가 대법원 판결 뒤집기를 시도하는 것에 분노를 느낀다.

감염당시 약품의 사용과 유통경로 조사 등 법적 대응할 수 있는 자료를 충분히 확보해야 한다.

20년 동안 바이러스를 가지고 살아오면서 감염환우들의 몸상태도 많이 변화하였고, 그런 개별적 상황이 소송에 반영되어야 한다.

녹십자측이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을 시에는 대중시위, 언론 활동 등 투쟁의 강도를 높여 전면에 나서겠다.

더 이상 잃을 게 없다.

라는 의견을 모았고, 코헴 임원진이 녹십자 대표를 만나,

이 사안은 모든 혈우환우들이 공감하며 함께 행동할 수 있는 문제이다. 환우의 인권을 존중하는 원칙을 가지고 반드시 해결되어야 한다. 코헴회가 끝까지 함께 할 것이다.

라는 코헴회 입장과 함께 소송인단의 의견을 전달하였다.

이에 녹십자측은,

녹십자 임원들은 재판중인 사안에 대해 신중한 입장이다.

지난 대법원 판결이 시효라든가 여러가지 면에서 법리적 공방의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다.

고등법원 판결까지 받아보고 판단하고자 하는 입장이다.

환자들의 입장과 마음은 충분히 이해하고 있으며, 변호사를 통해 듣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이러한 대화의 자리가 회사 임원진의 방향에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계기가 된다면 성과적이라고 본다.

라는 입장을 밝혔다.

그리고 최근 8월26일 소송인단은 코헴사무국에서 전체모임을 가져, 소송인단 대표를 구성하고 본 사건을 신속하고 명확하게 해결하기 위한 대외활동 계획을 세웠다. 이날 전체모임에는 성인이 되어 처음 소송인단 모임에 참석하는 감염환자 본인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은 혈액유래제제에 의해 감염될 당시 세 살, 네 살의 어린아이였고 이제까지는 선뜻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기 두려워 부모님들이 대신 법정싸움을 이어왔었다. 하지만 환자 본인들이 이제는 성인이 되어 자신들의 문제를 풀기 위해 세상 속으로 어려운 발걸음을 뗀 것이다.

녹십자는 더 이상 혈우환자의 HIV 감염 문제를 축소, 은폐하려 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대화와 피해보상, 재발방지책 마련에 발 벗고 나서라. 그렇지 않고 지금까지처럼 모르쇠로 일관한다면, 감염환자들 뿐 아니라 모든 혈우환자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투쟁에 나설 것이다. 또한 그로 인하여 벌어지는 모든 일들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사건 해결에 성실히 나서고 있지 않은 녹십자 측에 있음을 밝히는 바이다.

2012년 8월 30일
HIV소송인단, 한국코헴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