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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승리, 그것은 강제력이나 술책이 아닌 ‘배려’
김승근 주필  |  hemo@hemophil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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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0.03.15  05:2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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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예전, 그러니까 한국혈우재단이 설립되기도 전 80년대쯤으로 기억한다. 혈우병 환우들의 모임이 신촌세브란스 병원에서 알음알음 모이기 시작했을 때였다. ‘전국모임’이라는 안내를 받고 반가움 반, 호기심 반으로 모임에 참석했다.

예정된 시간이 되자, 여기저기에서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초면이지만 외모에서 전달되는 느낌이, ‘딱 보면’ 알 수 있었다. 시간이 되었는지 어떤 이가 마이크를 잡고 자신을 소개를 한 뒤, 최근 혈우병 소식을 전달했다.

잠시 후 ‘웅성웅성’ 거리는 소리가 났다. 아까와는 다른 느낌이, ‘딱 보면’ 알 수 있었다. 진행자도 예상치 못했던 돌발 상황임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무슨 말인지 도통 이해 할 수 없는 이야기들이 사방에서 터져 나왔다.

나에겐 ‘어떤 내용 인지’. 이것이 중요하지 않았다. 다만 분위기가 매우 무겁게 느껴졌고 성난 이들의 고성이 오고가는 모습이 보기에 좋지 않았다. ‘새로운 소식’을 기대했던 나에게 환우들 첫 모임의 느낌은 이렇듯 살벌했던 기억이 남아있다. 좀 더 정확히 이야기 하자면 환우들의 모임이 아니라 환우 어머니들과 나이든 환자들의 ‘갈등’ 모임이었던 것 같다.

대화 내용은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일그러진 얼굴들 모습만 가득했다. 조용히 앉아 있던 많은 이들은 하나 둘 그 자리를 떠났다.

그 후, 벌써 4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아이러니하게도 우리 혈우사회에서 이같은 모습은 수차례 반복되었다. 마치 사계절을 보내는 것처럼 혈우사회가 이렇게 돌아갔다. 한 때는 희망을 말하며 한 목소리로 의지를 불태우고, 또 다른 때는 눈을 흘기며 서로에게 비수를 던진다.

누가 이겼고 누가 졌을까?

당장에는 승자와 패자가 있었을지는 몰라도, 조금만 지나면 결국 ‘내가 이기고 내가 진 상황’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매우 허탈하다.

우리는 대체적으로 내가 스스로 판단하지 못할 때, 내가 신뢰하는 누군가의 판단을 따라 움직인다. 생각도 그와 함께 맞추려고 노력하고 그러다보면 내가 신뢰하는 그와 ‘한통속’이 된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고 나면 내가 신뢰했던 그의 생각이 달라져 있음을 알게 되고, 내 자신은 나와 다른 생각을 갖고 있던 이와 어느새 ‘한통속’이 되어 있다.

세월이 지난 후, 뒤를 돌아보면 이같은 현상이 생각보다 자주 반복되고 있다. ‘이 사람은 저 사람과 생각이 달랐잖아?’라고 생각했던 사람들끼리도 ‘한 편’이 되었다가 또 나뉘고 갈라서고 다시 모이게 된다.

그러다보니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머리 쓴다고 ‘술책’을 쓰거나 많이 안다고 ‘강제력’을 동원해봤자 시간이 흐르면 모든 것이 의미가 없고 허무해진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결코 변하지 않는 것과 반드시 변해야 하는 것이 우리 혈우사회에 있기 때문이다. 결코 변하지 않는 것 중에 한 가지는 ‘환자들은 편한 것을 지향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변하는 것은 ‘개선된 치료제’라는 것이다. 아무리 막으려 해도 막을 수 없는 것이 이런 것들이다. 이런 흐름은 거스를 수 없다. 강제할수록 반발이 커지는 것은 이러한 원칙에 반하는 일들이 걸림돌로 나타날 때이다.

혈우사회는 오랜 시간을 겪어오면서 슬기롭게 헤쳐 나가는 방법도 잘 알고 있다. 특정인의 능력이나 지혜가 아니라, 혈우사회의 커다란 시스템이 작용한다는 것이다. 이 시스템을 나의 편으로 세울 수 있는 가장 빠른 방법은 ‘배려’와 ‘섬김’이다. 상대와 나누려는 배려, 그리고 배려하는 자를 기꺼이 섬기려는 모습. 이러한 관계가 갈등을 줄이고 빠르게 서로 상생하는 모습이다.

혈우사회에서 치료제를 생산·공급하는 이들은 한치 앞의 방어나 공격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수 십년 앞의 그림을 설계해야 한다. 또한 환우들의 자세도 상대에 대한 ‘지적’이 아니라 ‘겸손’과 상대에게 ‘칭찬’을 더해야 한다.

상대를 칭찬하는 모습 속에 내 자신은 어느 덧 성숙해져 가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나보다 당신이 먼저’라는 배려를 실천하면서 어려운 이 시기를 잘 넘겨 가보자.

[헤모라이프 김승근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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